매일신문

[다민족 다문화 사회] "남편 없는 한국은 아직도 낯선 나라"

한국생활 18년째 일본인 주부 수기

얼마 전 하늘나라로 남편을 떠나 보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섰습니다. 얼굴이 퉁퉁 부어 있더군요. 한국인 남편을 만난 지 18년이 지났지만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한국인이 아니었습니다. 문득 '이제 일본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남편이 떠나고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간이 멈춰버렸으니까요. 딸 아이에게 일본으로 가자고 말했습니다.

고은이의 눈에 눈물이 가득합니다. "희정이랑 승수는 못 보는 거야?" 그렇게 좋아하던 떡볶이로도 달래지지 않습니다.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고은이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봅니다. 한국인이 아닌 그렇다고 일본인도 아닌 고은이가 겪어야될 현실을 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 시집와서 일본에 대한 모든 것을 지우려 했습니다. 주위에서 일본어를 쓰지 말고 일본에 대한 모든 것을 없애라는 강요를 많이 받으니까요. 하지만 제 어릴 때와 학창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고향의 흔적은 지워지지는 않더군요. 사랑하는 남편이 많이 아껴주고 보듬어 줬지만 저에 대한 정체성은 더욱더 흔들렸습니다. 일본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하면 할수록 더욱더 혼란해졌습니다. 시장에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일본말이 얼마나 미웠던지. 일본사람이라고 싫어하는 시장아주머니가 얼마나 야속했는지 모릅니다.

올해부터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유관순 언니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지요? 엄마 나라라는 인식 때문에 미워하지 못하고 좋아하지도 못하면서 감정에 혼란을 겪어야겠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딸아이에게는 정체성 혼란으로 상처를 받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고은이만큼은 제가 겪은 고통을 되물림시킬 수 없습니다.

어제 꿈에 남편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보내던 날 제가 부둥켜 안고 울었던 사진속의 모습처럼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더군요.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한참 동안 고은이를 바라보다 "당신이 씩씩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말만 남긴 채 가버렸습니다. 남편을 부르다 잠에서 깼나 봅니다. 고은이도 저 때문에 일어났나 봅니다. "엄마 나 일본에 가기 싫어. 난 한국사람이야." 그냥 고은이의 이마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결혼이주여성 히노준코(51) 씨가 지난해 12월 '문경시 다문화가정 행사'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을 딸아이를 생각하며 읽은 글입니다. 히노준코씨는 이제 남편이 없지만 딸아이와 함께 한국에서 영원히 살기로 결심하고 최근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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