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은 백두대간의 남쪽 끝줄기인 지리산의 동쪽으로 조선시대에는 산 그늘이 많은 지역이라는 뜻의 '산음(山陰)'으로 불리던 고장이다. 산청의 맑은 물은 지리산 자락을 휘감아 흐르는 경호강과 황매산에서 흘러드는 양천강에서 비롯돼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지리산 천왕봉의 동남쪽은 영남 사림의 양대 산맥으로 '경상좌도에 퇴계가 있고 우도에 남명이 있다.'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남명 조식 선생이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길렀던 산천재가 있는 곳이다.
조식(1501∼1572년) 선생은 많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평생을 보냈다. 조식 선생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에는 산천재와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교육하던 곳으로 1561년(명종 16년)에 세웠고 1818년(순조 18년)에 고쳐졌다. 마루에 앉으면 지리산 천왕봉과 덕천강의 지류인 시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툇마루 네 기둥에는 남명이 '상제가 사는 천왕봉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고 읊은 '덕산복거'라는 시가 걸려 있어 남명의 실천적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다. 산천재가 있는 뒷산 언덕 위에는 남명의 묘가 있다.
산천재에서 시천면 소재지를 지나 중산리 방면으로 5m쯤 가면 덕천서원이 나온다.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학교로 두 가지 기능을 한다. 하나는 사당을 세워 훌륭한 학자를 기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후학을 교육시키는 것이다. 덕천서원은 1576년(선조 9년)에 사림들이 남명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웠고 1609년(광해군 1년)에는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됐으나, 1868년(고종 5년) 대원군 때 없어진 것을 1926년에 다시 복원했다. 덕천서원에는 지금도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남명제라는 행사에 3천 명 이상이 참여하는 선비문화 축제가 열린다.
산천재 옆 도로 위쪽에는 남명기념관이 최근 문을 열었는데, 경내 왼쪽에는 정인홍, 허목, 송시열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있다. 1전시실은 남명의 수행과 실천에 관련된 서적과 경의검, 성성자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2전시실은 남명의 제자들을 주제로 한 공간이며, 3전시실은 남명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공간으로 유물과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남명 조식 유적지의 체험학습은 남명기념관에서 시작해 산천재를 거쳐 덕천서원으로 가는 답사경로가 일반적이다. 남명기념관에서 남명의 사상과 학풍, 유물 등을 통해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기념관 남쪽 하천변의 산천재를 둘러보며 건물의 배치 특성과 지리산 천왕봉 방향의 조망을 감상하면 좋다. 건물 내부의 그림과 기둥에 걸린 시구도 함께 음미한다면 운치가 제대로 난다.
그리고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덕천서원으로 이동, 선생의 학문 사랑과 선비 정신을 느끼고 서원 앞 개울가의 세심정에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최희만(영남삶터탐구연구회·오성고등학교 교사)
참고자료 : 삶터탐구활동 길잡이(대구남부교육청)
■ 남명 조식 유적에 대한 Q&A
▷남명 조식 선생은 어떤 분인가?
남명은 1501년(연산군 7년) 합천군 삼가에서 조언형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학과 도가사상을 섭렵하며 학문의 폭을 넓혔다. 기묘사화로 작은아버지 조언경이 죽고 아버지도 파직돼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후 처가인 김해 탄동에 산해정을 짓고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30대 후반에는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 유학의 쌍벽을 이루며 실천적 성리학을 중시했다. 모든 벼슬을 마다하고 오직 학문과 제자양성에 전념하다가 1572년(선조 5년) 72세에 세상을 떠났다.
▷남명 선생이 지리산에 들어온 까닭은?
남명이 지리산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진 이유는 그의 '덕산에 터를 잡고서(德山卜居)'란 시에서 '상제가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천왕봉이 마음에 든다.'는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남명은 61세 때 지리산 아래 덕산에 들어와 새로 집을 짓고 '산천재'(山天齎)라 이름하여 12년을 살았다. 이것은 주역의 '산천대축'(山天大畜) 괘의 뜻을 본받아 자신이 닦은 도를 강건하고 독실하게 실천해 덕을 완성하고자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따라서 남명이 이곳 지리산에 들어온 이유는 세상에 나아가지 않지만 천왕의 세상을 구현할 사상을 후학들에게 철저히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남명 조식의 학풍은 무엇일까?
남명의 학문은 실행에 중점을 둔 지행합일을 추구하는 '경의학'(敬義學)이다. 다른 학자들도 경을 중시했지만 남명의 경우는 죽는 날까지 경과 의를 실천한 대표적인 유학자라 할 수 있다. 경(敬)이란 안에서 바른 마음을 갖는 것이요, 의(義)란 밖으로 사물을 올바르게 처리해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알고서 올바르게 실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이러한 실천사상을 배운 후학들이 임진왜란 등 국난을 당했을 때 의병으로서 크게 활약하는 정신적 계기가 됐다.
◆주변에 이런 곳도!
▷목면시배유지(사적 제108호)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있으며 고려 후기에 우리나라 최초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다. 1363년(공민왕 12년)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목화 씨앗을 붓통에 넣어가지고 온 것을 장인 정천익과 함께 시험재배를 했다. 처음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 겨우 살렸지만 3년간의 노력 끝에 성공해 전국에 목화재배를 널리 퍼지게 했다. 전시관에서는 목화 재배법과 가공법, 의생활에 대해 체험학습할 수 있다.
▷남사마을(남사예담촌)
남사마을은 실개천이 마을을 반달 모양으로 휘감아 돌고 덩치 큰 기와집 40여 채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빽빽이 들어차 있는 마을이다. 산골에 이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한 것은 이 마을에 성주 이씨와 밀양 박씨, 진양 하씨 등 여러 성씨가 수백 년간 살면서 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해 꽤 큰 마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남사마을은 북쪽의 실개천을 경계로 상사마을(단성면 시월리)과 접해 있어 두 마을을 함께 지칭하는 경우가 많으며 동제를 지낼 때에도 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특히 남사마을은 마을의 생김새가 반달 모양이어서 '달도 차면 기운다.'는 이치를 교훈삼아 달이 차지 않도록 마을의 가운데는 농지로 비워 두었고 상사마을에서도 마을이 배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우물 파기를 금해왔다. 전통 목조 한옥 85채가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연일 정씨댁, 선산 최씨댁이 잘 보존되어 있어 남부지방 양반가옥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리산(국립공원 제1호)
지리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로 알려져 왔으며 신라 5악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해서 '지리산'(智異山)이라고 불려왔다. 또 백두산의 맥이 반도를 타고 내려와 이곳까지 이어졌다는 뜻에서 '두류산'(頭流山)이라고 불리고 불가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높은 스님의 처소를 가리키는 의미를 빌어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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