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TV만 본다 `재밌는 영화`를 찾아서~

P씨(27).

얼마 전 거금을 들여 풀HD TV를 장만했다. 52인치에 손에 닿을 듯한 선명한 화질. 요즘 TV에서 방영되는 HD영화를 보는 재미에 빠져 있다. TV 장만 후 처음 맞는 설 연휴. 그는 설 TV영화를 섭렵하기로 마음먹는다.

5일 밤부터 9일까지 5일간 방영되는 공중파의 영화는 모두 34편. 2시간씩 잡으면 68시간, 이틀하고도 20시간이 걸린다. 매일신문 TV편성표를 오려 든 P씨는 자신만의 TV관람 편성에 들어간다.

5일

연휴 전날 밤. 가장 느긋한 시간이다. 오후 11시대에 두 편이 방영된다. '캐리비안의 해적2'와 한국영화 '이장과 군수'. 캐리비안의 해적들이 떼로 나돌아다니며 럼주를 퍼마시는 해양활극이 성공할 줄이야. 이건 한물간 장르가 아니었던가. 그 성공비결은 살아있는 캐릭터에 CG로 그려낸 활극일 것이다. 특히 조니 뎁이 연기한 잭 스페로우의 능청스런 모습은 일품이다. '이장과 군수'는 20년째 라이벌이 이장과 군수라는 뒤바뀐 위치로 재회한다는 코미디 영화. 두 편 다 편하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명절 영화다.

그런데 방영시간이 정확하게 겹친다. P씨는 '캐리비안의 해적2'를 낙점한다. 잭 스페로우가 물레방아 위에서 싸우는 장면과 오뚝한 코, 큰 눈망울에 당찬 이미지의 여배우 키이라 나이틀리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HD TV로 매혹적인 그녀를 볼 수 있다니 벌써부터 두근거린다.

6일

본격적인 연휴 첫날. 오후 3시 30분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가 방영된다. 2006년 개봉된 미키 사토시 감독의 일본영화. 일본의 작은 지방도시를 배경으로, 무료한 삶을 사는 23세의 젊은 주부가 자신들이 스파이라고 주장하는 미스터리한 부부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코믹물이다. 처음 공중파를 타는 영화고 오후 시간대의 유일한 영화이다 보니 안 볼 수가 없다.

오후 7시 50분 '못 말리는 결혼'이 방영된다. 졸부 복부인과 가부장적 풍수지리가.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집안의 못 말리는 사돈 맺기를 그린 코미디. 중견배우 김수미와 임채무가 나온다. 솔직히 그리 구미가 당기지는 않는다. 문제는 밤 시간대. '동갑내기 과외하기2'와 '가문의 부활' '작업의 정석' '배트맨 비긴즈'가 같은 시간대에 편성됐다. 그런데 '작업의 정석'과 '배트맨 비긴즈'는 여러 차례 방영된 바 있다. 케이블TV로 본 것만도 몇 번짼가. 재탕 삼탕 편성에 맥이 빠진다.

고민하던 P씨 같은 시간대 EBS에 '페인티드 베일'을 발견하고 쾌재를 부른다. '킹콩'의 나오미 와츠와 연기파 에드워드 노튼이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로 유명한 영국 작가 서미싯 몸의 소설이 원작. 콜레라가 창궐하는 중국을 배경으로 세균학자이자 의사인 부부의 진정한 사랑이야기를 그려낸 수작이다.

0시 15분에 방영되는 당나라 황실에서 벌어지는 비극적 멜로물 '황후화'도 볼 만한 작품. 장 이모우 감독이 그려내는 압도적인 웅장함과 고혹적인 황금빛의 시대극이다. 30여 분 겹치지만 P씨는 '페인티드 베일'을 보고 '황후화'로 채널을 돌리리라 마음먹는다.

7일

설날이다. 차례를 지내는 오전 시간대에 편성된 영화가 없어 안심이다. 편성표를 보다 보니 또 눈에 걸리는 영화들이 있다. '미녀는 괴로워' '복면 달호' '본 아이덴티티' '야연'. 몇 차례나 TV에서 본 영화들이 또 설 연휴 특선영화로 편성돼 있다. '야연'은 지난 설에 방영됐고, '복면 달호'와 '미녀는 괴로워'는 지난 추석에 방영된 영화다. 이미 구입한 TV판권이니 본전을 뽑자는 속셈인가.

그러고 보니 8일 방영되는 '괴물' '우주전쟁'도 지난해 추석에 방영된 작품이다. 추석에 하고 설에 하고, 이대로 가면 올해 추석에 또 이 영화들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52인치 구입한 첫해 재탕영화를 보는 맛이라니. 이건 너무 심한데. 그래도 0시 10분에 '가족의 탄생'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가족의 탄생'은 홀로 분식집을 운영하는 미라네(문소리) 집에 5년 동안 소식이 끊긴 말썽 많은 동생(엄태웅)이 무려 스무 살 연상의 여인(고두심)을 데리고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애인(류승범)과 결별 후 엄마(김혜옥)와 사별을 맞는 여성(공효진)의 이야기, 그리고 인정이 넘치는 여자친구(정유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청년(봉태규)의 이야기.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세 이야기가 후반부에 연결되는 독특한 형식의 드라마로, 혈연과 무관한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가족'의 의미를 그린 작품이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통해 데뷔했던 김태용 감독이 상업성을 의식하지 않고 연출한 두 번째 작품이다.

8일

오전 시간대에 문제의 명절 단골영화 '괴물'과 '우주전쟁'이 포진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괴물'은 지난 추석에도 하고, 한 달 전에도 TV에서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명절마다 찾아오던 성룡이 '괴물'로 변신? 차라리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을 선택하자.

밤 시간대에 송강호의 '우아한 세계'와 '상사부일체' '해리포터와 불의 잔' '미녀 삼총사2'가 배치돼 있다. 이날 라인업은 완전히 개념상실이다. 눈에 띄는 것도 없고, 흥미로운 작품도 없다. 그나마 '우아한 세계'는 다시 한 번 더 볼 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목숨까지 내놓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기러기 조폭 아버지의 슬픔이 공감이 가는 영화다. 아내와 딸이 보내준 비디오를 보면서 라면을 뒤집어엎던 송강호. 그런데 그 라면마저 퍼 담아야 하는 현실이 정말 가슴 짠하게 했었지.

9일

한국영화 '극락도 살인사건' '돈텔파파' '마강호텔' '마파도2'와 외화 '본 슈프리머시' '매트릭스3'가 편성돼 있다. '본 슈프리머시'는 신종 첩보영화 본 시리즈의 2탄이다. 가공된 액션의 007영화와 달리 본 시리즈는 리얼 액션이 재미를 더한다.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본 슈프리머시'는 전편에서 보여준 긴박한 추격 장면에서 스파이 영화의 매력을 흠씬 느낄 수 있고, 후반부 고난도 스턴트 액션으로 등장하는 자동차 추격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김석훈 김성은 주연의 '마강호텔'은 '만일 조폭이 구조조정 당하면 어떻게 될까'를 콘셉트로 하고 있다. '우아한 세계'처럼 조폭에 우리 사회를 빗댄 영화인데, '조폭'에 목을 매는 한국영화의 끝물, 어째 씁쓸하다.

보통 같으면 3편이 시리즈로 묶여 나올 법한데, 왜 하필 3편이지? '매트릭스3'가 뜬금없다.

P씨는 재탕 삼탕 오락영화 일색인 설연휴 TV영화들 속에서 그나마 '도쿄 타워'로 TV영화 유람기를 마치는 것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설 TV영화 찾아보기

5(화) (HD) 캐리비안의 해적 2 MBC 오후 11시10분

(HD) 이장과 군수 TBC 오후 11시15분

6(수)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KBS1 오후 3시30분

(HD) 못 말리는 결혼 KBS2 오후 7시50분

(HD) 동갑내기 과외하기 2 KBS2 오후 11시5분

(HD) 가문의 부활 MBC 오전 10시35분

(HD) 황후화 MBC 7일 오전 0시1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