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인간 영혼의 사원이자 인류의 인문사회학적 귀중한 자산인 것처럼 모국어는 모국의 혼이자 정신의 지문이다. 시골 들판의 이름이나 넘실거리는 바다의 이름(海名)이 모두 고유어로 호명되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공동체 삶 속에 묻혀 있던 방언과 함께 모국어가 영어의 쭉정이가 되어 내버려질 위기에 처해 있다. 영어 교육이 강화되는 사회, 교육환경의 변화는 전통적으로 통용되던 호명 체계와 방식이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 삶을 지탱해 주던 전통적인 우리말이 밀려난 텅 빈, 그 빈자리에는 영어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와 자리를 채우고 있다. 현실 뒤에 모양을 드러내지 않은 온갖 어두운 그림자를 온전히 읽어 내지 못하는 영악한 산업자본주의에 물든 이 시대의 염량세태 세태가 안타깝기만 하다.
국제적으로 한국어의 위상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언어 사용자 수를 기준으로 한국어는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와 비슷한 세계 10위권이고 국외에서 한국어를 학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다. 지난해 9월에는 유네스코 세계지식재산권 기구에서 한국어를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 등에 이어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국제공개어로 채택함으로써 명실 공히 한국어가 국제어로 부상하게 되었다. 최근 세종의 국가 경영 철학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 가운데 '한글' 창제의 위업을 민족적 자랑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이제 겨우 우리 말과 글을 민족의 자긍으로 여길 만하니, 다시 먹고사는 방법을 빌미로 하여 영어소통 체계로 바꾸려는 것은 민족의 영혼을 뒤흔들어 버리겠다는 발상이다. 영어와 타갈로그어를 공용어로 사용함으로써 생겨난 문화적 손상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웃 나라의 사례도 있지 않은가?
최근 우리 국민의 국어 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의 경우 40명 중 6, 7명이 한글을 해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문화가정 자녀의 상당수는 우리 말과 글을 쓰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이들의 국어능력 향상을 위해 다양한 정책이 절실한 실정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초등학교에 영어가 정규 교과목으로 들어간 지 이미 10년이 지났다. 많은 논쟁 끝에 강행된 이 제도가 남긴 것은 사교육비의 증가와 온 국민의 영어 열병만을 앓게 하였고 영어 교육을 대변하는 '기러기 아빠'와 '펭귄 아빠'라는 한국 가정 해체와 사회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였을 뿐이다. 영어를 어떻게 가르치면 세계 최하위 수준의 영어 실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 개발에 힘쓰기보다는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영어 교육을 강화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한 국가정책이 아니다.
언어 교육은 단지 단순한 의사소통을 해결하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의 문화 창조와 주체성 확립까지 고려하는 복합적인 문제가 내재해 있다. 또 한국어 교육과 영어 교육은 우리 국민 모두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더욱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 한 나라의 교육 정책은 국가의 백년대계이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교육 정책에 큰 비중을 두는 것은 세계의 흐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만큼 한국어 교육 정책에도 비중을 두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국립국어원은 국어기본법에 의거하여 국민의 국어능력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토대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하려고 한다. 문해 능력이란 가정과 직장에서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 데 필요한 문서 해석 능력을 말한다. 산업사회를 지나 고도의 지식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문해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이러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보다 다양한 국어 정책을 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국어능력 실태 조사가 이루어지면 1970년 통계청 조사 이후 38년 만에 문맹률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통계치가 나오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국립국어원은 비문해자를 대상으로 한 문해 교육, 국제결혼 이주여성과 그 자녀에 대한 대책 마련을 비롯하여 국민 전반의 국어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수립·시행하고 제안할 계획이다.
이상규 국립국어원장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