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류의 영화소설집/무라카미 류 지음/박혜수 옮김/친구미디어
현대인들에게 있어 영화는 꼭꼭 감춰진 추억의 보물 상자와 같은 구실을 한다. 우리의 인생 곳곳에는 우리가 봤던 영화들이 자리하고 있어, 그것을 우연히 다시 볼 때마다 당시의 아스라한 추억들이 놀랄 만치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이다. 나는 '개 같은 내 인생'을 볼 때마다 내 중학생 시절의 열병과 쑥스러움을 고스란히 되살린다. '트레인 스포팅'을 다시 보면 그 속에는 입대를 앞둔 시절 막 놀아도 하얗던 내 친구들의 앳된 얼굴들이 들어있다. 수능을 치고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보고, 갓 제대를 한 뒤 '벨벳 골드마인'을 봤으니, 그 두 영화 속에 내 젊음의 넘칠 듯한 해방감이 짙게 배어있음은 당연하다. 역으로 우리는 특정한 장소를 통해, 잊고 있었던 추억의 영화를 기억해내기도 한다. 나는 롯데백화점 건너편을 지날 때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들려오는 듯하며, 교대 앞을 방문할 때는 마티유 카소비치의 '증오'가 어슴푸레 느껴진다. 수성교를 건널 때면 이제는 의류방출창고가 되어버린 옛 극장에서 수십 편의 영화들이 몰래 빠져나와 내 뒤를 유령처럼 쫓는 환상에 빠지기도 한다.
무라카미 류의 '영화소설집'은 이처럼 누구에게나 있을 청춘과 영화에 대한 추억을 버무려놓은 자전적 이야기이다. 소설은 70년대 초 도쿄를 배경으로 작가의 다난했던 청춘과 그 청춘의 역정 사이에 가로등 불빛처럼 드리워진 영화들을 조명한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을 본 후, 자신의 데뷔작이 될 소설을 찢어버릴 뻔했다. 같이 가짜 마리화나를 팔러 다닌 야쿠자와 '라스트 픽쳐 쇼'를 봤고, 동거녀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한 후 복잡한 심경으로 '대탈주'를 봤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사막을 볼 때마다 그는 돈 때문에 포르노 사진을 찍어야 했던 친구 '레이코'를 떠올린다.
세상은 빠르게 바뀐다. 그러나 우리가 봤던 영화들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그 영화에 깃든 추억도 덩달아 화석처럼 고정된다. 그런 고로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가슴속에 한 권씩의 '영화소설집'을 품고 산다. 류의 '영화소설집'은 여기에서 인기작가의 별난 청춘을 엿보는 재미 그 이상의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우리 자신의 서럽고 낯 뜨거운 '영화소설집' 속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화소설집' 안에서 우리는 그리운 사람들이 '주름이 거의 없는 깨끗한 얼굴로' 웃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난 류의 이 소설이 정말 사랑스럽다.
박지형(지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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