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저자와의 대화] 소설가 박정애

나의 웃음 속엔 여섯식구 돌본 엄마의 한숨이…

소설가 박정애(38)는 어린 시절 10년을 보낸 고향을 '산천은 아름답되 삶은 척박한 곳'으로 기억한다. 경북 청도군 매전면…, 감나무 많고 정 많은 고장이지만 작가에게 고향은 '결핍의 기억'일 뿐이다. 어머니는 오빠를 낳고 결핵성 뇌막염으로 3년 동안 병원에서 지냈다. 어린 자식을 홀로 책임져야했던 아버지는 절망을 술로 달랬다. 아버지는 술로 세상사를 잊고 또한 버렸다. 3년 만에 퇴원한 어머니는 고관절이 굳어 평생 다리를 절었다.

어머니는 불편한 다리를 끌며 네 자식과 술에 빠진 남편을 건사했다. 자식 도화지 한 장 사줄 10원이 없어 이웃집을 전전했다.

'촌구석에 눌러 앉아서는 자식들 공부 못 시킨다.'

대구로 왔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고향의 논밭 팔아 마련했던 어머니의 한복집은 구멍가게로, 노점으로 변해갔다. 여섯 식구가 살던 독채 전세는, 방 두 칸 전세로, 지상 단칸방으로, 지하 방으로 옮아갔다. 봉지쌀을 팔아 여섯 식구가 두 끼를 먹었고, 한 끼는 라면으로 때웠다. 술과 담배에 젖은 아버지의 흐리멍덩한 눈은 세상을 쳐다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56세에 알코올 쇼크로 세상을 등졌다.

박정애는 초등학교(국민학교)시절 종일 소설을 읽었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촌뜨기, 가난뱅이라 친구가 없었다. 박정애에게 소설이라는 허구의 세계는 도피처이자 낙원이었다.

용돈이 없었던 박정애에게 친구가 생긴 것은 6학년 무렵부터다. 친구들과 과자를 나눠먹을 돈은 없었지만 그녀에게 '음란자본'이 있었다. 박정애는 남독꾼이었고 이제 막 '음란물의 가치'를 알기 시작한 사춘기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박정애 곁으로 몰려들었다. 오늘날 그녀의 직업이자 삶이 된 '스토리텔링'의 시작이다.

가난했던 박정애는 실업계고교에 진학해야 했다. 그러나 '못돼 처먹은(식구들의 표현)' 박정애는 인문계 고교(남산여고)를 고집했다. 이왕 인문계에 갔으니 공부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읽은 소설은 공부 밑천이 돼 주었다. 문장력, 사고력, 배경지식…. 그래서 공부는 꽤 잘했고 적어도 겉보기에 그녀는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그 속은 '날라리' 였다. 마음으로 무시로 '간음'을 일삼던 날라리.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은 참고서, 문제집을 구해주셨고, 장학금도 주선해 주셨다. 당시 지원한 대학(서울대)에 직접 가서 시험을 쳐야 했는데, 선생님이 차비를 쥐여주셨다.

소설가 박정애는 밝고 평화로운 웃음을 가졌다. 그녀를 몇 번 만났지만 티 없는 웃음과 '으르렁대는' 그녀의 소설은 좀처럼 하나로 연결되지 않았다. 거침없는 웃음, 체제 순응자였음을 증명하는 학벌(서울대 신문학과-현재는 언론정보학과), 그런 사람이 어째서 '불만에 찬 듯한' 소설을 쓸까? 그녀의 웃음과 다만 문자로 기록된 이력은 그것을 설명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박정애의 역사소설 '강빈'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던 소현세자의 아내를 그린 것이다. 강빈은 그 자신 볼모의 신세였지만 함께 끌려온 조선인들을 먹이고 입힌 여장부였다. 작가는 "저 유명한 황진이와 허난설헌을 규정하는 키워드가 '여성 예술가' 라면 강빈은 '여성 지도자' 입니다. 우리가 저 옛날의 인물을 오늘로 호출하는 것은 그 인물의 지향과 우리 시대의 요구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21세기는 돌봄, 평화, 생태적 감수성 등과 연관된 여성적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강빈은 현재적 요구에 부응합니다."라고 설명했다.

박정애의 작품 전반에는 '어머니와 딸'이 등장한다. 그녀는 동어반복의 위험, 어쩌면 지루해 보일 수 있는 위험에도 끊임없이 어머니와 딸의 역사를 변주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역사는 문학과 신화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차고 넘칩니다. 제가 어머니와 딸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내로라 하는 작가들이 아버지와 아들에 매달려 있으니 저라도 어머니와 딸을 형상화해야겠다는 소명의식(?)이 발동한 것입니다."

박정애가 어머니와 딸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요즘 쓰고 있는 소설은 '남녀상열지사'에 관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음란물을 탐독했으니 아마 그 '선정성'은 남다를 것이다.

작가는 강원대학교 스토리텔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대구를 떠나 살았다. 그녀는 대구를 '애증이 교차'하는 장소라고 했다.

"대구에 어머니, 오빠 식구들, 친척들, 친구들이 많아요. 대구 사람들은 무조건 대구 것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온 나라가 다 알아주는 춘천 닭갈비도 대구 사람들은 '닝닝'해서 아무 맛도 없다, 고 평가하죠. 하하."

박정애는 글을 쉽게 쓰지 않는다고 했다.

"내 글을 출판하느라 소중한 나무가 희생된다는 사실, 독자가 내 글을 읽느라 돈과 시간과 정력을 지불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합니다. 글 쓰는 사람들은 한 글자, 한 글자 심혈을 기울여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 생각을 늘 염두에 두고 글을 씁니다. 지구에 죄짓지 말자는 거죠."

소설가 박정애에게 고향 청도는 '결핍'의 장소다. 그러나 마음이 휑한 날 눈을 감으면 고향집 뒤 감나무 숲이 떠오른다고 했다.

'겨울바람에 떠는 나목, 막 연둣빛이 돋아나는 잎, 계통없이 떨어지는 감꽃, 아직 익지 않은 감을 삭혀 먹던 날, 감이 붉게 익어가고 감장수가 집으로 찾아오던 날, 드문드문 남은 홍시, 감 껍질 말려 먹던 어린 나….'

"퇴직하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늙은 감나무처럼 드문드문 소설을 쓰다가 어느 날 문득 죽었으면 좋겠어요."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박정애는…

장편소설 '물의 말' 2001년 한겨레문학상 수상. 왕실 여인 최초로 국제무역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한 소현세자빈 강씨의 이야기 '강빈'을 통해 어머니와 딸의 역사(herstory)를 복원했다. 2005년에 청소년 소설 '환절기', 2006년 동화 '똥 땅 나라에서 온 친구'를 썼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