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온 나라를 뒤흔드는 정치쟁점이 되어 있고 전문가들의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핵심 주제는 간단하다.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해답은 간단하다. 좋은 선생 밑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 혹 좋은 선생이 없으면 어떡하나? 그때는 혼자서 열심히 하면 된다.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널려 있는 것이 영어교재다. 영어방송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고 인터넷에도 영어가 넘쳐난다. 꼭 어학실습실에 가서 앉아 있을 필요도 없다. 주머니에 쏙 넣거나 아니면 목에 걸고 다니는 작은 MP3 플레이어에 영어프로그램을 입력해서 소리 소문 없이 연습할 수도 있다. 벤치에 앉아서도,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심지어는 식사 중에도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필요한 문장들을 익힌 다음에는 기회 닿는 대로 한번 써먹어 본다. 그렇게 하다 보면, 고급스런 영어는 몰라도 간단한 회화 정도는 되기 마련이다. 미국인과 똑같이 영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식의 과도한 상상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요즘 영어교육을 개혁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고, 심지어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는 영어교육혁신을 제2의 청계천 사업이라고까지 비유했다. 영어를 잘하자는데, 그것도 공교육을 통해서 그리하겠다는 데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영어교육이 통째 엉터리였으니 그걸 모두 뜯어고쳐야 한다고 드는 것은 잘못이다. 이렇게 나오는 논거는 의외로 아주 단순하다. 영어교육이 문법 중심이어서 회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십 년 이상 영어를 공부했는데도 입 한번 벙긋 못한다"라는 한탄이 따라붙는다. 매우 익숙한 소리다. 알다시피 똑같은 논리를 내세워 학교 교육이 소위 실용영어 중심으로 개편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대학의 영어교육에서도 교양영어가 물러나고 토플이니 토익이니 취업영어니 하는 실용영어가 오래전에 그 자리를 대체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문법 중심이어서 영어가 안 된다니? 요새 학생들은 몇 마디 더 할 줄 아는 대신에 너무 문법을 몰라서 원서를 읽어내야 하는 대학에서는 거의 대책이 없을 지경이 아닌가.
짚어두어야 할 진실은 영어는 외국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영어가 세계어라지만 어디 가나 영어가 통하는 것도 아니다. 중국어는 영어 이상으로, 스페인어도 영어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물론 영어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언어이기 때문에 영어에 더 치중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영어공부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친 나머지 전공지식이나 소양이 부족하게 되면 낭패다. 몇 년 전부터 영어실력을 기른다는 명분으로 강의를 영어로 하게 강요하거나 부추기는 대학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인데, 여기에 솔깃해 하는 사람들은 아주 명백한 진실에조차 눈멀어 있다. 즉 딱하게도 학생들의 공부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이 쳐서 하루 7시간 공부하는 학생이 있다 하자. 학교가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를테면 4시간을 영어에 투자한다면 정작 중요한 전공과목이나 교양을 기를 시간은 3시간밖에 남지 않는다. 그 학생이 졸업할 때는 어떻게 되겠는가? 영어는 약간 나아졌을 수도 있겠지만 전문적인 식견은 빈약한 어중간한 존재가 되어서 교문을 나설 것이다. 이런 존재를 경쟁력 있는 인재라고 부르기는 어렵겠다.
우리 영어교육이 과잉되어 있으면서도 방향을 못 잡고 있는 것은 영어를 필요 이상으로 강요하는 사회분위기 탓이 크다. 영어는 일상생활에서 쓸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조차 억압하고 배우라고 강요된다. 전 국민이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그날까지 앞으로 앞으로 나가자는 식의 개념 없는 정책이 영어교육을 오히려 왜곡시키는 것이다. 영어를 통한 국제경쟁력은 많은 독서량과 식견을 갖춘 교양 있는 영어를 구사할 때 생기는 것이지, 전 국민을 토막영어가 가능한 어정쩡한 존재로 만든다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외국어 공부는 동기가 확실하고 꾸준히 해야 성과가 나는 법인데 이런 국민개병식의 영어교육이 성공할 리 만무다. 그러나 설혹 성공한다 해도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써먹을 데가 없어 애석할 것이니 그 무슨 낭비일까?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위정자들은 자랑한다. 영어를 못하면 무슨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무고한 국민들을 주눅 들게 만들면서도, 문법 중심으로 공부한 저 엉터리 영어교육의 희생자들이 그 위업을 이룩한 장본인이라는 생각은 왜들 안 나는지 필자는 늘 궁금하다.
윤지관(한국문학번역원장·덕성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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