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대부분의 학교가 개학을 했다. 개학을 앞두고 학생들은 대개 밀린 숙제를 하느라 법석을 떨지만, 그 와중에도 누가 볼까 슬며시 숨기는 게 있다. 방학 시작할 때 그렸던 생활계획표다.
세월이 흘러도 모양은 바뀌지 않는다. 컴퍼스로 크게 돌린 원을 30분~1시간 단위로 나누어 색을 칠한다. 큰맘 먹고 오전 6시부터 오후 12시까지 빡빡하게 계획을 세운다. 일과의 대부분을 공부와 독서로 채우는 건 기본. 그렇게 책상머리에 떡하니 붙이고 방학을 시작하지만 3일을 지키는 법이 없다. 초등학교부터 고교까지 여름, 겨울 줄잡아 스물네 번을 그려도 좀체 나아지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계획을 세울 때 충분히 생각하지 않은 탓이다. 해야 할 일, 하고자 하는 일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의 역량과 주어진 여건에 맞지 않는다면 그 계획은 헛일이 될 수밖에 없다.
매사가 이와 다를 게 없다. 기획 단계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방안은 성공에 이를 가능성이 낮다.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기도 힘들다.
과거 대구시의 사업 방식이 그랬다고들 한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구·경북 출신들이 정권의 주류를 차지한 동안 대구는 그야말로 '무기획의 도시'였다. 대강의 사업 골격만 잡아 중앙정부에 넘기고 "우리가 남이가!" 하고 들이대면 척척 풀렸다는 얘기다.
그리고 지난 10년, 대구시 공무원들은 기획력 부족이 얼마나 뼈아픈지 절감했다. 아는 얼굴 하나 찾기 어려운 정부 부처에서 설득력 떨어지는 사업계획서 달랑 들고 돌아다니기란 참으로 고달픈 일. 그렇게 구걸하듯 예산을 받아와도 실행 과정에서 생각 못한 문제들이 쏟아지는 바람에 성과는 모래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대구는 되는 일이 없다."고 아우성치는 시민들을 달래는 일은 덤이었다.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지는 법. 10년 사이 대구시 공무원들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사업 기획 단계부터 최선을 다하고, 설득력 있는 계획서를 만들어내기 위해 연구용역, 전문가 자문, 현장 실사 등 가능한 모든 노력을 투입하는 습관이 생긴 것. 대구에 긴요한 사업이 중앙정부에서 후순위로 밀리자 대구시의 국장이 예산부처 실무자를 초청, 현장 설명을 하고 필요성을 설득하는 풍경도 어색하지 않은 일이 됐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둔 요즘 대구시 공무원들은 중앙부처 출장 명령에 볼멘소리를 하지 않는다. 아는 얼굴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와줄 게 없느냐"고 빈말이라도 던져오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결코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이럴 때야말로 걱정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청와대, 산업자원부 등에서 오랫동안 일한 박봉규 대구시 정무부시장은 "그나마 나아졌던 대구의 기획력이 다시 퇴보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업무로 만났는데 첫 마디부터 고향을 묻고, 출신 고교를 확인한 뒤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던 과거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기획은 사업의 효율은 물론 성패까지 좌우하는 중요한 일이다. 타당성을 높이고 설득력을 갖춰야 어떤 일이든 시작이 가능하다. 초등학생의 방학생활계획표가 던지는 경고를 대구시라고 피할 수는 없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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