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남대문

대문은 집의 경계를 표시하고 위상을 과시한다. 민가의 사립문서 사대부의 솟을대문, 제주도의 정랑까지 모양과 크기는 달라도 대문은 집안의 사랑과 자부심을 지켜왔다. 오래고 낡은 대문일수록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이 더 깊고 든든해 보인다.

남대문이라는 이름으로 정겨운 崇禮門(숭례문)은 조선 수도 한양의 대문이자 왕조의 대문으로 지어졌다. 태조 4년 1395년 창건하여 1398년 완공했다. 1447년 세종조에 제대를 높여 보다 웅장하게 개축한 이후 1479년 성종 시대에 다시 대대적인 보수를 했고 해방 이후 1963년 중수했다. 국보 1호로 손색없는 단단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1907년 일제가 요시히토 황태자의 서울 나들이를 맞아 남대문의 좌우 성벽을 철거하고 전찻길과 도로를 내면서 도로 위에 고립된 모양새가 됐다. 하지만 남대문은 그 이후 서울역이 인근에 만들어지면서 서울의 상징이자 나라의 상징물로 더욱 국민 가까이 다가왔다. 서울길이 열차로 통하던 시대에 장삼이사 아이 어른 구분 없이 서울역에 내리면 든든한 남대문이 반겨주었다. 번화한 서울이 낯설어서 설레면서도 한편으로 불안스러워하는 시골사람들에게 남대문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믿음직스럽게 반겨주었다. 남산'중앙청'영등포'신촌 방향 등 갈 길을 가리켜 주면서 '걱정하지 말라, 굳세게 살아라'고 나직이 말하는 듯했다. 그렇게 온 국민을 맞이하며 얼굴을 익혀주던 남대문이었다.

그래서 서울 구경을 한번도 못해본 아이들도 "남남 남대문을 열어라"는 노래를 부르며 술래잡기 놀이를 했다. 어른들은 바지 지퍼가 열려 있는 친구를 보면 "남대문이 열렸다"며 놀리곤 했다. 남대문의 정겨움과 소중함이 알게 모르게 국민들에게 밴 것이다.

소실되고 보니 왜란, 호란, 한국전쟁 등 온갖 난리 통에도 몸 다치지 않고 꿋꿋이 민족의 정기를 지켜온 의연함이 결코 간단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한다. 많은 국민들이 원통해 하는 이유다. 숭례문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드러내놓고 禮(예)를 숭상하는 자손이 되라고 600년을 묵묵히 일러왔거늘. 전혀 예를 알 바 없는 한 자손에 의해 무참히 소사하고 말았다.

예를 숭상하라는 가르침을 어디서 찾을 것이며 길 잃은 사람들에게 누가 길을 가리켜 줄 것인가.

김재열 논설위원 soland@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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