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임 덕(Lame duck)'은 18세기 영국 증권가에서 사용되던 말이다. 오늘날 런던 왕립증권거래소로 번역되는 '로열 익스체인지(Royal Exchange)'는 정작 17·18세기엔 주식 브로커들의 출입을 금지했다. 매너가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로열 익스체인지'에서 밀려난 브로커들은 할 수 없이 인근 커피하우스에서 주식을 사고팔았다. 그런 커피하우스 중 가장 인기를 끌었던 곳이 바로 '조나단스 커피하우스'였다. 이곳에는 온갖 브로커들이 몰려들었고 몇몇은 하우스 내에 사무실까지 차릴 정도였다.
브로커들이 몰리면서 고의든 아니든 디폴트(Default·채무 불이행)를 선언하는 경우도 흔했다. 채무를 이행할 수 없는 브로커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조치는 커피 하우스 출입을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어김없이 '레임 덕'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이는 '약속을 이행하기를 거절한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레임 덕'은 무리를 따라 잡지 못해 손쉽게 포식자의 먹이가 되는 오리를 말한다.
비록 형사 처벌은 않았지만 '레임 덕'의 위력은 대단했다. '레임 덕'이라는 딱지는 당사자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증권가에서의 추방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다른 커피 하우스를 찾아 기웃거릴 수는 있었지만 이미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 더 이상 브로커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뒤뚱거리는 오리는 186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의 제15대 대통령인 제임스 부캐넌(James Buchanan·재임 1857~1861년)이 그 첫 불명예를 안았다. 남북전쟁의 빌미가 됐던 남부 11주의 미연방 탈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맞아 임기 말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그에 대해 미국인들은 처음 '레임 덕' 딱지를 붙였다.
이 후 '레임 덕'은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브로커'에서 '정권 말기의 권력 누수 현상'을 뜻하는 정치용어로 변신했다.
'레임 덕'이 당사자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레임 덕'은 떠나가는 대통령에게 있어 늘 악몽이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를 반긴 대통령이 있었겠느냐만 우리나라 대통령은 유독 심하게 휘청거렸다. 5년 임기 동안 무소불위로 권력을 휘두르다 종말을 맞는 우리나라 대통령 제도 탓이다. '내가 결정하고 너희는 따르라'는 제왕적 통치에 젖어 있는 대통령에게 '레임 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퇴진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레임 덕'이 없는 정부라고 큰소리쳐 왔던 노대통령도 이삿짐을 꾸리고 있을 것이다. 평소 서쪽으로 가자면 동쪽으로 가던 노대통령이다. 마지막으로 '레임 덕'마저 인정하고 싶지 않은가, 엉뚱한 헛발질로 국민을 피곤하게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어제 학교용지부담금 환급 등에 관한 특별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지난달 28일 여·야 국회의원 223명이 출석한 가운데 216명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의결된 법안이다. 이 법안은 다름 아닌 헌법 재판소가 2005년 3월 학교용지 매입비용을 국가가 아닌 분양자에게 부담하도록 한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에 이은 후속 법안이기도 하다. 어디 이뿐인가. 노대통령은 새 정부가 마련한 정부조직개편안에까지 몽니를 부리고 있다. 후임 정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재를 뿌리고 있다. 이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새 내각도 제대로 꾸리지 못한 채 출발해야 할지 모르는 딱한 처지다.
단 하루를 남겼더라도 노대통령이 신경 쓸 것은 깔끔한 국정의 마무리다. 현 정부가 가장 큰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한미FTA안이 우여곡절 끝에 12일에야 국회 통외통위에 상정됐다. 17대 국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하는 노대통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레임 덕'에 빠진 대통령이 여전히 힘이 있다고 만용을 부리는 순간 나라는 엇길로 간다. 정치권력의 세계에서 '레임 덕'은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정해진 시간표다.
정창룡 논설위원 jc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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