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완옹주같은 한복으로 맞춰주세요."
한복전문점'숙진'의 손예진 원장은 최근 결혼을 앞둔 한 신부가 드라마 주인공 사진을 들고 찾아와 깜짝 놀랐다. 드라마'이산'의 화완옹주같은 분위기의 한복을 맞춰달라고 한 것."신부 관례복은 흔히 홍색치마에 연두 저고리인데, 그 신부가 주문한 것은 검정 치마에 화려한 금박이 박힌 한복이었어요. 사극이 한복의 트렌드까지 바꿔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안방극장에 사극이 풍년이다. 현재 공중파에 방송 중인 사극만 해도'이산'(MBC), '왕과 나'(SBS),'대왕세종'(KBS), '쾌도 홍길동'(KBS) 등 네 편이나 된다. 케이블TV OCN은'메디컬 기방 영화관'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화려한 기녀 복식을 선보인 바 있다. 일주일 내내 사극 주인공들과 만날 수 있는 셈이다.
이들 사극 속 패션도 진화하고 있다. 달라진 시청자의 눈높이 때문이다. 고증에만 신경쓰던 시대는 지나갔다. 고증을 기본 바탕으로 하되 주인공의 성격, 극의 분위기에 따라 창조적인 의상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 가장 트렌디한 패션, 한복
한복 전문가들은 최근 사극 속 한복의 경향은 고증에 바탕을 두되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더욱 화려하고 세련된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복연구가 김명숙(김명숙 한복 대표) 씨는"최근 사극은 의상 뿐만 아니라 머리 모양까지 현대감각을 가미한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사극 속 한복의 트렌드를 가장 집약해 나타내는 것은 색상. 최근 사극에는 울긋불긋한 원색 대신 파스텔톤이 주류다. 화사한 파스텔톤의 의상은 화면을 훨씬 밝게 해줘 고화질 HD TV로 감상하는 시청자들의 시각을 만족시켜준다. 드라마'이산'에서 송연(한지민)의 옷은 푸른색에 보라색이 도는 빛깔로, 요즘 유행하는 파스텔 색채와 일치한다.
여성뿐만 아니다. 남자 출연자들 역시 왕이나 무사하면 떠오르는 붉은색, 푸른색 의복 대신 검정, 청록색의 세련된 의상을 입는다. 이처럼 최근엔 채도를 낮춰 은은한 느낌이 나는 색상이 사극 의상의 트렌드를 이룬다.
'선' 또한 과감해졌다. 사극 속 한복은 한복 특유의 곡선미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직선을 과감하게 도입하고 있다. 양팔 아래로 늘어진 둥근 라인 대신 양팔에 꼭 맞게 재단된 현대적 의상은'한복은 불편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있다. 시청률 경쟁에 돌입한 월·화드라마 '왕과 나'와 '이산'의 여주인공들은 대부분 좁은 폭의 저고리를 입고 등장한다.
옷 길이도 변한다. 세손 시절의 정조를 연기하는 이서진의 옷은 기존 사극보다 길이가 더 길어서 신발의 발등 부분에 끝자락이 닿을 정도. 이는 요즘 유행하는 긴 실루엣 옷과 일맥상통한다.'왕과 나'에선 풍성한 치마에 짧은 저고리 길이가 돋보인다. 이는 하체가 더욱 길어 보이는 효과를 낳고 있다.
'메디컬 기방 영화관'(OCN)은 가슴 선을 살짝 덮는 초미니 저고리를 선보인다. 화려한 문양과 다크 브라운, 골드 등 파격적인 색상을 도입, 최대한 섹시한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옷을 보면 캐릭터가 보인다
사극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있진 않다. 주인공의 캐릭터에 따라 옷의 색상과 디자인이 달라진다.
드라마 '이산'의 여성들은 정치권력에 직접 개입하고 있다. 여성들의 높아진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여성 주인공들의 치마 폭이 훨씬 넓어진 것이 특징.
이 드라마에서 온화한 성격의 견미리와 박은혜는 부드러운 색감으로, 권력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성현아와 김여진은 빨강·검정·파랑 등 강한 원색을 사용, 성격을 드러낸다.
특히 화완옹주는 현대 여성의 이미지를 가미하기 위해 검정색 당의에 은박으로 문양을 표현하고, 화관이나 첩지 대신 새로운 스타일의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여주인공 한지민의 직업인 도화사는 허드렛일을 하는 하급직이지만 주인공인 만큼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강조했다. 제작진은"조끼의 배색은 어려 보이면서 활동적인 느낌을 강조하고, 치마의 가슴말기 색깔을 기존의 흰색 대신 치마색과 비슷하게 해 길어보이는 효과를 줬다."고 밝혔다.
'왕과 나'에서 내시 의상은 고증보다는 캐릭터를 돋보이는데 주력했다. 기존 연약한 이미지인 내시의 존재감을 강력하게 보이도록 여러 가지 포인트를 줬다. 극 중 판내시부사(전광렬)의 의상은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를 강조하기 위해 진한 색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호위 내시들의 의관도 색감이 강렬하다. 내시들이 반복적으로 나오다보니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던 것. 정혜락(계명문화대 패션디자인과) 교수는"드라마'왕과 나'에서 인수대비, 폐비 윤씨 등 왕비의 강렬한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스란치마에 금박을 많이 사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 '나도 화완공주처럼, 황진이처럼 '
모던한 디자인과 독특한 배색으로 무장한 한복 의상들은 이미 실제 한복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실제로 2006년 방송됐던 드라마'황진이'(KBS)의 한복은 일반인들의 패션 트렌드에도 반영, 드라마 방영 당시 한복 가게에는 주인공 황진이의 한복이 빠짐없이 걸려있기도 했다. '황진이'의 매화꽃 프린팅 저고리 원단은 일본 스시집 유니폼으로도 제작될 정도로 인기품목이 됐다.
이 때문에 요즘 한복 가게들은 사극 한복 유행 따라잡기에 한창이다.
한복전문점'숙진'의 손예진 원장은"사극 주인공 사진을 들고와 똑같이 맞춰달라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전했다."하지만 이들 한복의 색감은 화장을 진하게 한 연예인들에겐 어울리지만 일반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서 "최근 한 스튜디오에서'왕과 나'의 복식을 재연해달라고 했지만 일반인에게 어울릴 만한 색감으로 교체, 제작했다."고 말했다. 각자의 체형과 얼굴 색깔에 어울리는 한복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신부의 관례복도 한층 화려하게 주문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한편 사극 한복열풍으로 전통한복의 원형이 훼손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김복연 한복명장은"사극을 보면 고증과 상관없는 한복이 마치 전통의상인 것처럼 등장할 때가 있다."면서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현대화하는 것도 좋지만 전통을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변형하는 세태를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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