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마니아와 함께 떠나는 세계여행]남아프리카 나미브 사막

할머니의 배낭-"여행 다니며 60년간 몰랐던 나를 알게 됐어"

-할머니의 배낭

배낭 여행자, 그들은 모두 전사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나라의 골목길을 씩씩하게 걷고 있는 그들, 돈 아끼느라 생수 한 병에 바게트 빵을 베어 먹으며 하늘·바람과 세계를 꿈꾸는 자유를 이불 삼아 덮고 자는 그들은 용감한 전사다. 때론 소매치기에게 배낭을 털리고, 기차를 놓치고, 길을 헤매다가도 자신처럼 홀로 헤매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면 또 금방 훤히 웃는다.

남아프리카의 나미브 사막에서 독일인 예나 할머니를 만났다. 분홍색 티셔츠에 깨끗한 면바지, 새하얀 모자를 쓴 세련된 유럽 할머니가 홀로 아프리카의 모래 언덕을 부지런히 넘고 있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콧잔등에 떨어질 듯한 안경을 겨우 걸치고, 한 손에는 1.5리터 짜리 물병을, 다른 한 손엔 무거운 망원렌즈 카메라를 든 채였다. 할머니의 거친 숨소리가 뜨거운 열기 속을 사정없이 헤집는다.

"당신도 혼자 왔어?"

나를 발견한 할머니가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할머니와 나 사이는 3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였는데 모래 속으로 발이 푹푹 빠지는 통에 쉬이 가까워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래사막 여기저기 점처럼 흩어져 있고 할머니와 나는 이산가족을 상봉한 마냥 애타게 거리를 좁히며 걸었다.

"사진 한 장 찍어줄 수 있어요?"

가까이 다가서자마자 할머니는 '헉헉'거리며 내게 카메라를 내밀었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멋진 풍경을 만날 때마다 사진 찍어줄 사람이 없는 게 늘 아쉽다. 뷰파인더 속에서 할머니의 얼굴이 끝도 없이 오렌지 빛으로 물든 사막 한 켠에서 희색을 띤다.

"할머니, 정말 혼자 여행하시는 거예요?"

잠시 숨을 고른 후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 당신들도 혼자서 여행하는데 나이든 우리는 더 잘 하지." 할머니는 요즘 유럽의 영어회화학원에는 퇴직하고 배낭여행을 꿈꾸는 할머니 할아버지 학생이 붐빈다고 전했다. 젊고 건강할 때 여행하는 것도 좋겠지만 나이 들어 여행하면 더 좋은 게 있다며 할머니는 눈을 찡긋거렸다. "젊은 당신은 모르는 게 있거든. 내 나이쯤이면 이렇게 사막을 걷기만 해도 바람이 삶의 비밀을 다 가르쳐주지."

그 때부터 그늘 하나 없는 뜨거운 사막 위에서 할머니의 유쾌한 수다가 시작됐다. 남편은 2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떴고, 아들 한 명은 파리에, 또 다른 아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살지. 하이델베르크에서 혼자 살고 있는 할머니는 손자손녀가 셋이란다. 어릴 때부터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게 꿈이었는데 바쁘게 일만 하다가 세월을 다 보냈다. 여행을 하면서 할머니는 인생을 다시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60년을 살아도 몰랐던 내 모습을 새롭게 알게 됐거든."

밤이 되자 사막은 칠흑처럼 깜깜해졌다. 사막을 헤매던 여행자들이 캠프장에 모여 텐트를 쳤다. 나미브 사막은 나미비아(남아프리카공화국 위에 있는 나라)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2천 킬로미터에 걸친 광활한 지역이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은 매일 어마어마한 규모의 모래언덕들을 마치 빗자루로 쓸어 담듯이 감쪽같이 쓸어 옮기고 있다.

일주일마다 거대한 모래 언덕 하나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건너편에 새로운 모래언덕이 솟아난다. 부웅붕~ 모래언덕을 쓸어담는 사막의 바람은 우리의 작은 텐트도 사정없이 흔든다. 손전등을 놓은 텐트 안에는 할머니와 나의 커다래진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배낭 메고 다니기 힘들지 않으세요?"

할머니는 자기 배낭을 보여 주었다. 할머니의 배낭은 미노의 손가방처럼 작고 귀여웠다. 속옷주머니, 세면도구주머니, 바나나, 쿠키 한 봉지, 지도, 돋보기 안경, 소설책, 여행책, 일기장, 팬 하나, 지갑 등. 할머니가 꺼내놓은 배낭 속의 보물은 더도 덜도 아닌 딱 여행을 즐기기에 필요한 것들이다. 할머니는 주섬주섬 약봉지 하나를 꺼냈다. 나이 들면 약도 여행필수품이라며 할머니는 수줍게 웃었다.

"굿 나잇!"

침낭 속으로 들어간 할머니는 곧 코를 골았다. 할머니, 멋지다.

미노=본명은 김미정, 1975년생. SBS'진실게임'에서 방송작가로 일하다가 자신이 쓰고 있는 방송 대본보다 시시하고 재미없는 자신의 삶에 체해 2003년 6월, 갑자기 세계일주여행에 나섰다.'수상한 매력이 있는 나라, 터키 240+1''미노의 컬러풀 아프리카 233+1','미노의 별 볼일 있는 유럽 숙소 여행'을 펴냈다. 현재'강호동의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서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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