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얼마나 쉽게 남을 믿을까. 익히 알고 있던 사기 수법에 본인이 직접 당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의문을 풀기 위해 지인들을 상대로 직접 '전화사기(?)'를 시도해봤다. 연령대는 20대~40대로 다양했고 남성 6명과 여성 4명 등 모두 10명이었다. 수법은 가장 많이 알려져있는 통신회사 사칭 수법. 통신회사 고객센터라고 속인 뒤 개인정보을 알아내고 계좌이체까지 유도하는 식이다.
지인들을 선택한 이유는 우선 '뒷감당을 할 수 있어서'. 또 익숙한 목소리인데도 모른채 속는다면 더 문제가 심각할 것이라 판단했다. 5명에게는 직접 전화를 했고 5명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우선 개인정보 수집을 한 뒤 계좌 이체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기자의 통장에 돈을 보내주는 어리숙한 지인은 없었지만 개인정보 수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10명 중 3명이 개인정보를 노출했고 6명은 따지거나 전화를 끊었다. 1명은 아예 욕설을 했다.
◆너무 쉽게 속는다='팔자에 없는 보이스피싱이라니. 이러다가 인간관계 다 끊어지는거 아니야?' 걱정이 앞섰다. 막상 수화기를 드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남을 속이는 일,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정말 못할 짓이다. 지인들이고 취재를 위한 일인데도 이렇게 떨리다니. '금방 내 목소리를 알아챌거야.'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단 한명도 기자의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했다. 연기력이 좋았던 걸까, 지인들이 어수룩했던 걸까.
띠리링.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고객님. 00이통통신 고객센터입니다."
"네, 무슨 일이시죠?"
"고객님의 휴대전화 요금이 32만 8천 원이 연체되었습니다."
"예? 그럴리가요."
"자세한 확인을 위해 본인 확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주민등록번호 13자리를 말씀해주십시오."
"아, 예…. 칠사공팔이사…."
개인정보가 줄줄 새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거나 받은 5명 중 3명의 입에서 주민등록번호와 집주소가 술술 흘러나왔다. 순순히 말해주진 않았다. 연체 내역을 보내달라거나, 분명 휴대전화 요금을 납부했다며 불평했다. 자동이체 통장에 잔금이 있다는 볼멘 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개인정보를 말했으니 이미 게임 오버. 내친 김에 계좌이체도 시도해봤다.
"연체가 길어지면 고객님의 신용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지금 알려드리는 계좌로 바로 이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거 보세요.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돈을 보냅니까. 제가 알아보고 다시 전화드리죠."
다행히 아무도 송금하진 않았지만 조금만 상황이 달랐어도 이체할 뻔했다는 대답이 나왔다. 회사원 이모(34·여) 씨는 "사실 통장에 잔고가 없었는데 연체됐다고 하니까 가슴이 뜨끔했다."며 "통화 내용을 듣던 주변에서 말리지 않았다면 실제 돈을 보낼 뻔 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전 수법인 문자메시지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기자가 보낸 5통의 요금 연체 메시지에 1명 만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가 개인정보를 알려준 것은 물론이다.
남성보다는 여성이 보이스피싱에 취약함을 보였다. 남성 6명 중 5명이 꼬치꼬치 따져묻거나 아예 응대를 거부했다. 반면 여성 4명 중 2명은 손쉽게 주민번호를 알려줬으며 통화 내내 어쩔 줄 몰라했다.
◆난 바보일까=이제 식상하기까지 한 보이스피싱. 납치나 세금·연금 환급, 신용카드대금 연체 등 수법이 충분히 공개됐고, 대처 요령도 충분히 알려졌건만 피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지인들이 속은 이유는 간단했다. '연체됐다.'는 말을 들으면 연체됐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서고, 연체될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냈다는 것. 자동이체한 통장 잔고가 부족하거나 지로로 납부해 전산처리가 안될 수 있다거나, 실제 휴대전화 요금이 연체된 상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엉터리 점술가가 "당신, 어릴 적에 큰 일을 당할 뻔했지?"라며 다그칠때 기억조차 희미한 소시적을 떠올리곤 '용하다.'며 무릎을 치는 것과 같다. 회사원 이모(34) 씨는 "평소 휴대전화를 많이 쓰는데다 수 개월 전 번호 이동을 하면서 내지 않은 요금이 있는 줄 알았다."며 "계좌 이체를 하라는 얘기에 퍼뜩 정신이 들었지만 전화 사기라고는 생각치 못했다."고 말했다. 식당을 하는 박모(45) 씨는 "평소 사용하는 전화요금보다 훨씬 많이 연체됐다는 말에 앞뒤 안가리고 전화를 걸었다."며 "다행히 지난달에 결제를 했기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입금을 할 뻔했다."고 털어놨다.
전화 통화를 한 대부분이 단박에 보이스피싱임을 알아채지 못한 점도 특이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발신자번호가 대구시내 전화번호인데다 전화를 건 사람이 한국말에 유창(?)했던 점, 통화 품질이 국제전화와 달리 깨끗했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 결국 본인이 알고 있던 보이스피싱의 유형과 살짝 달라져도 의심을 버린다는 결론이 나온다. 문화 관련 일을 하는 강모(35) 씨는 "한번도 가입한 적 없는 통신회사에서 요금 연체를 운운해 의심을 했지만 보이스피싱이라는 생각은 미쳐 하지 못했다."며 "금융기관이나 관공서, 통신회사 등에 자주 인적 사항을 노출하는 현실도 개인 정보 유출에 둔감한 이유"라고 말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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