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공간 속에서 호흡하며 살아간다. 공간은 인간을 제약하기도 하지만 인간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중성을 가진 공간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존재로 다가온다. 건축가는 효율과 최적화의 대상으로 공간을 바라보며 물리학자는 자연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공간을 탐구한다.
공간이 예술가를 만나면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키는 모태가 된다. 가장 현대화된 한국화, 한국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작가로 평가받는 김호득(58) 영남대 교수는 공간을 집요하게 탐한 예술가다.
대구 수성동아백화점 인근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은 흑(먹)과 백(한지, 광목천)의 이분법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먹투성이인 바닥과 먹물이 가득한 플라스틱 통, 출동 대기중인 병사처럼 늘어선 흰 종이가 그림에 대한 작가의 열정을 대변해 준다. 작업실 한쪽 구석에 자리잡은 오디오에서는 다소 생뚱맞게 재즈 음악이 흘러나온다. "큰 낙으로 삼았던 술을 끊은 뒤 취미 삼아 재즈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정형화된 클래식에 비해 자율성과 즉흥성이 묻어 나는 재즈가 여백의 미가 있는 동양화와 잘 어울립니다."
작업실 외 김 교수가 예술적 공간을 탐하기 위해 의존하는 또다른 물리적 공간은 한지와 광목천이다. 고집스럽게 먹 작업만을 하다 보니 먹의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한지와 광목천 만을 사용하게 됐다.
그동안 그의 예술적 공간 기행은 파노라마 같은 인생 만큼이나 변화를 거듭했다. 때로는 점, 때로는 선의 형태로 화폭에 구현됐다. 김 교수에게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 실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호흡하는 존재의 거처 같은 것이다. 전통적 동양화가 시간을 두고 자연을 음미하면서 전체를 화폭에 담는 거시적 공간을 탐한 반면 그는 한 때 미시적 공간을 탐했다. 폭포 전체를 그리기보다 물줄기만 클로즈 업 시킨 뒤 짧은 시간동안 영감을 쏟아 붓는 식의 작업을 해 왔다. 전통 수묵을 박진감 넘치는 추상의 경지로 이끌며 기존 동양화에 대한 저항과 반발의 길을 선택한 김 교수를 화단에서는 '고독한 아웃사이더'로 불렀다.
그러다 1996년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끊은 뒤 '회화란 무엇인가', '공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물음을 자신에게 던지며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다. 길을 잃었을 때 왔던 길을 되돌아 간 뒤 처음 시작한 지점에서 길 찾기를 하는 것처럼 그는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공간 모색을 시도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점찍기다. "빈 한지에 점을 하나 찍는 순간, 점과 공간 사이에 관계가 설정되고 공간은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두번째로 점을 찍는 그 순간 처음 점은 과거, 두번째 점은 현재, 비어 있는 여백은 미래를 위한 공간이 됩니다." 김 교수는 공간을 지워나가는 일련의 과정인 점찍기를 통해 공간이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을 시간적으로 풀어냈다.
그는 엄밀히 표현하면 점이 아니라 획이라고 말한다. 3번을 찍어 하나의 점을 완성하는 까닭에 선이 살아 있고 형태까지 갖추고 있다는 것. 같은 농도로 점을 찍어 나가기 위해 평균 하루 12시간 씩 꼬박 3일을 투자해야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고되고 지루한 작업을 통해 김 교수가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흔들림, 문득-사이'라는 화두 아래 10여년 동안 진행된 점찍기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고민과 감정, 행위를 공간화시키고 가시화시킨 것이다.
그의 화풍 변화는 그동안 많은 찬반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김 교수는 2005년 한 해를 쉬면서 다시 한번 변화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03년 이중섭 미술상 수상 영광을 안긴 점찍기는 회화적 변주를 주기에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자체 판단 때문이다.
"회화는 공간에 대한 철저한 탐색을 요구하는 공간 예술입니다. 회화는 평면 공간에 작가의 생각을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간에 대한 탐색을 멈출 수 없습니다." 예술가에게 공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표현하는 김 교수의 공간 탐색은 계속될 전망이다.
글·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