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상생의 땅 가야산] (32)폐허로 남은 가야산 암자들

백운동 곳곳 사찰·암자 폐허들 '천년무상'

▲일요암 터에 있는 육대신장과 그 주변 돌들은 가야산 비경과 어울려 신비감을 자아낸다.
▲일요암 터에 있는 육대신장과 그 주변 돌들은 가야산 비경과 어울려 신비감을 자아낸다.
▲흰 눈이 소복이 내려 포근한 분위기가 감도는 백운암 터.
▲흰 눈이 소복이 내려 포근한 분위기가 감도는 백운암 터.
▲도은암 위쪽에 있는 백운대는 스님과 도인들의 수행처로 이름이 나 있다.
▲도은암 위쪽에 있는 백운대는 스님과 도인들의 수행처로 이름이 나 있다.
▲지도
▲지도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이 화마에 휩쓸려 처참하게 무너져내렸다. 610년을 버텨 온 자랑스럽고, 소중한 문화재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검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붉은 화염 속에 스러져 가는 숭례문을 보며 국민들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문화(文化) 민족이란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몇 백억 원을 들여 똑같은 모습으로 복원하더라도 그것은 예전의 숭례문이 아니다. 역사적 가치는 물론 추억조차 지니지 못한 21세기의 건축물일 뿐이다.

무관심과 방치, 소홀함, 그리고 탄압 등에 의해 우리 곁을 떠난 문화재가 비단 숭례문뿐일까? 알게 모르게 스러져간 문화재들이 너무도 많다. 국보인 숭례문에 비견될 수 없겠지만 불교가 융성했던 가야산 동남쪽에도 사라진 문화재들이 많다. 바로 폐허로 변한 사찰과 암자 등 불전(佛殿)들이다. 나무와 잡초들이 무성한 사찰과 암자 터에 서면 사라진 것에 대한 진한 아쉬움과 함께 아련한 아픔이 느껴진다.

#육대신장 있는 일요암 터!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를 출발, 용기골 등산로를 오르면 백운2교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 50여m를 더 가면 서성재로 오르는 등산로와 마애여래입상으로 가는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북쪽으로 난 마애여래입상 가는 길을 따라 300m가량을 가면 다시 갈림길이 나오는데, 북쪽으로 난 길을 200여m 더 오르면 일요암(日曜庵) 터의 축대가 눈에 들어온다.

제수천 전 성주문화원장에 따르면 일요암은 고려말기에 호군 송천우가 그의 장인 도길봉을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곳. 일요암에는 도길봉의 형 도길부와 얽힌 이야기도 간직하고 있다. 고려말 운봉대첩에서 큰 공을 세운 도길부는 고려왕조를 향한 충성을 굽히지 않아 죄를 쓰고 쫓기는 몸이 되어 가야산 심원사에 머물고 있었다. 병사가 심원사에 이르자 석존상 스님이 나와 꾸짖기를 "비록 죄지은 이가 있든 없든 사문(寺門)을 침입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병사들이 물러갔다. 그후 도길부 등은 일요암에서 말년을 보냈다는 게 성주의 역사와 인물 등을 담은 '경산지(京山志)' 고려사 명인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일요암지엔 현재 4단의 축대가 남아 있다. 암자의 터는 동서로 34.2m, 남북으로 20m다. 제1단 축대에서 주춧돌 흔적은 찾을 수 없으나 토기편과 와편이 산재해 있어 건물의 존재를 짐작하게 한다. 제2단 축대의 오른쪽엔 육대신장(六大神將)으로 불리는 육각형 기둥이 서 있다. 기둥의 직경은 60cm, 한 변의 길이는 30cm, 높이는 1.2m다. 각 면에는 정축신장, 정해신장, 정유신장, 정미신장, 정사신장, 정인신장이 음각돼 있다. 주위로는 18개의 장방형 석재가 수직으로 세워져 있다. 언제, 누가, 무슨 연유로 세웠는지 모르지만 육대신장과 그 주변의 돌들은 아름다운 가야산과 어울려 신비롭게 다가온다.

일요암지 북서쪽 일대에는 샘 두 곳이 있다. 또 육대신장 오른쪽 기암절벽 아래엔 선방(禪房)굴이 있다. 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좁아지며 요즘도 이 선방굴에는 많은 무속인들이 찾아와 기도처로 삼고 있다.

#세월의 더께 쌓인 폐암자들!

일요암을 돌아나와 다시 서성재로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 걷는다. 백운리 대피소에서 칠불봉으로 가는 등산로를 따라 약 600m를 가다 보면 등산로 오른쪽에 백운암(白雲庵) 터가 나온다. 등산로에서 20m 정도 떨어져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백운암의 정확한 유래 및 연혁은 그 어느 문헌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백운리 중기마을에 그 터가 남아 있는 법수사가 창건(802년)되면서 그에 따른 부속 암자로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현재 암자 터에는 두 개로 이뤄진 축대가 남아 있다. 또 샘터와 와편 등 여러 가지 유물들도 널려 있다. 하단부만 남은 맷돌도 눈에 띈다.

법수사에 딸린 다른 암자들로는 도은암(道恩庵), 보현암(普賢庵), 미타암(彌陀庵) 등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도은암은 가야산 남쪽에 있는데 심원사와 8리(3.2km)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성산지(星山誌)'에는 도은암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멀리 앞을 바라보면 시야가 탁 트여 가히 수백 리를 볼 수 있구나. 서북쪽으로 깎아 선 바위벽에 이끼와 덩굴풀로 인해 푸른 벽을 둘렀고, 돌 틈 사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돌 샘과 무너진 옛터를 허겁지겁 오르면 옛날부터 일러온 백운대더라. 옛날부터 백운대는 도승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도은암이 있었던 도은암골은 동그라미골로도 불린다. 골짜기로 들어서면 도은폭포(도로에서 약 100m), 선녀담(仙女潭·도은폭포 위 약 20m) 등이 비경을 이루고 있다. 도은암골 중심에 웅장하게 서 있는 북바위(鼓岩:도로에서 약 500m)는 흰빛 화강암으로 큰 북을 닮아 그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용기사 서북쪽 2리(800m)쯤에 있었다는 미타암과 얽힌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다. 신라 경덕왕 때 혜숙법사 등 신도 수십여 명이 만일(萬日:10년)을 기약하고 미타사를 건립했는데 이때가 서기 742년. 신도 아찬 귀진의 비(婢) '욱면'이 귀진을 따라 입산해서 정성을 다해 염불, 성불했다. 욱면은 전생에 축생도(畜生道)에 있어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소가 되어 불경을 싣고 다닌 후에 귀진의 집 여비로 태어났다는 것. 염불하기 9년 만에 사찰의 들보를 뚫고 뛰쳐나가 대광명을 발하고 부처가 되었다가 사라졌다는 얘기다.

가야산 동남쪽에 암자들이 많이 들어서고, 융성했던 것은 당시 시대상황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통일신라에서 후삼국을 거쳐 고려로 넘어가는 어지러운 시기,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풍파를 피해 가야산으로 숨어들었다. 이무렵 가야산은 수도장은 물론 세인들에게 동경과 피안(彼岸)의 땅이었으리라. 8세기 중반부터 1897년 용기사가 폐사되기까지 가야산 동남쪽 백운리 일대는 1천여 년 동안 불국토(佛國土)가 된 셈이다. 아직도 혼돈의 세상이 끝나지 않은 탓일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안식을 찾기 위해 가야산으로 발길을 돌린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협찬:경상북도, 성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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