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할미꽃 보호지구'라고 써놓고 3.3㎡남짓한 땅에 줄을 쳐놓은 곳을 볼 수 있다. 할미꽃이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해놓았으리라. 응달에 눈이 채 녹기도 전에 가장 빨리 봄을 알리던 꽃이 할미꽃이다. 양지바른 곳이면 논두렁이고 무덤가고 가리지 않고 쏙 꼬부랑 허리를 내밀던 꽃이 할미꽃이다.
할미꽃은 진달래와 달리 먹을 수가 없었다. 꽃대가 길지 않아서 꺾어서 병에 꽂을 수도 없다. 그래서 그다지 인기가 있는 꽃이 못 되었다. 그렇다고 할미꽃을 본척만척하지는 않았다. 봄을 맞으러 산과 들로 달려나온 아이들이 그냥 둘 리가 없다.
"야, 할미꽃이다!", "할미꽃꼭두각시 만들어서 시집보내자"
아이들은 할미꽃을 뚝뚝 꺾어 꼭두각시를 만든다. 꽃잎을 위로 말아 올려 족두리를 만든다. 노란 수술이 예쁜 얼굴이 되고 진한 보라색 꽃잎이 족두리가 된다. 꽃받침에서 내리 꽂은 가는 나무막대는 꼭두각시의 몸통이 된다.
"꼬꼬재배, 신랑이 색시에게 절을 하세요."
"이번에는 색시가 신랑에게 절을 하세요."
꼭두각시 시집보내기 놀이는 언제나 재미가 있다.
"어? 벌써 할미꽃 씨앗이 맺혔다!"
"정말이네. 빨리 따서 까까중대가리 만들자."
할미꽃이 지고 나면 씨앗이 긴 털을 달고 동그랗게 모여 있다. 아이들은 그 씨앗을 많이 모아 손바닥으로 비벼서 둥그렇게 만든다. 그렇게 손으로 비비면 긴 털은 안으로 모이고 보드라운 씨앗이 밖으로 모여 둥근 공모양이 된다. 크기가 탁구공만하며 놀기에 딱 알맞다. 그 모양이 마치 스님들 까까머리 닮았다고 해서 아이들은 '까까중대가리'라고 했다. 까까중대가리는 그냥 혼자서 둥글둥글 비비고 놀아도 좋다. 보들보들한 씨가 손바닥에 닿는 촉감이 좋아서다. 서로 던지고 받고 하기도 한다. 놀이가 시들해지면 아이들은 놀던 그 까까중대가리를 아무렇게 내던져버린다.
이처럼 흔했던 할미꽃을 이제는 만나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이 족두리를 만들지도 않고, 까까중대가리를 만들지도 않는데 말이다. 왜 그럴까? 놀랍게도 아이들이 할미꽃을 꺾어 놀지 않고 그대로 두어서 그렇단다.
"할미꽃은 아이들이 꺾어서 놀아야 씨를 퍼뜨려요. 아이들이 자연으로 가서 놀지 않아서 할미꽃이 멸종되어 가는 겁니다."
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는 농학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할미꽃 씨앗은 덜 익은 상태에서 흙과 만나야 씨앗이 튼단다. 누구도 건드리지 않아서 다 익은 다음에 저절로 땅에 떨어지면 거의 싹이 트지 않는단다.
세상의 이치가 이렇구나! 이런 놀라운 일이 있나! 그래 자연은 아이들을 기다리고말고. 순진무구하기 이를 데 없는 아이들이 자연의 동무지. 그렇고 말고.
봄방학이다. 아이들을 들로 산으로 내닫게 해보자. 그 추운 겨우내 들판에는 도대체 무엇이 살고 있었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해보자. 우리 마을에 있는 앞산, 그 산이 아이들 생활 속으로 들어오도록 해보자. 아이들은 거기서 적지 않은 것을 배우고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윤태규(대구금포초교 교감)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