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체험학습] 통영·한산도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한쪽 끝을 담당하는 경남 통영에 가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통영은 통제영의 약칭으로, 곳곳에 통제영의 문화와 이 충무공과 관련된 유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통영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향토역사관에는 임진왜란 및 통제영 산하 12공방 관련 자료, 이 충무공과 관련된 자료를 접할 수 있다. 한산도 제승당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크게 무찌른 수군의 본영으로 제해권을 장악하고 국난을 극복한 한산대첩의 유서 깊은 사적지이다.

여객선 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가다 보면 바다에 한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거북등대를 볼 수 있다. 배에서 내려 오른쪽 해안 도로를 따라 유적과 주변 경관을 감상하면서 10분 정도 걸으면 제승당에 도착한다. 제승당 가는 길은 오솔길처럼 좁은 길이 바닷가로 길게 이어져 있는데, 길 안쪽으로는 소나무가 길을 가릴 정도로 울창하다. 경내에는 제승당, 수루, 충무사 등 20동의 건물과 내삼문을 위시하여 일곱문과 59만5천여m²의 풍치림이 장관을 이룬다.

경내 정문 맞은편에 위치한 제승당은 한산도 이 충무공 유적지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임진왜란 때 성웅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을 지휘하던 곳이다. 여기에 세계 해전사에서 길이 빛나는 충무공 전적을 그린 5폭의 해전도와 현자총통, 지자총통, 거북선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승당 경내의 바다 쪽에 위치해 있는 수루는 적의 동정을 살피던 망루이다. 충무공이 수루에 홀로 앉아 우국충정의 시를 읊은 곳이기도 하다. 수루 중앙에는 승전고가 놓여 있다.

제승당 경내의 가장 안쪽에 있는 사당인 충무사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원래 '충무영당'이라고 하였으나, 규모가 협소하여 1976년 정화 사업 때 경역을 확장하여 정영모 화백이 제작한 새 영정을 모시고 '충무사'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 한산도 이 충무공 유적지는 정유재란 때 원균의 패전으로 폐허가 된 지 142년 후 107대 조경 통제사가 복원, 운주당 옛터에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는 친필 현판을 걸었다. 통제영 폐영 후 일제강점기에는 지방 선현들이 충렬사영구보존회를 조직, 일제의 온갖 압박과 갖은 고난을 겪으며 충무공 유적을 수호하였다. 일제 패망 후 통영충렬사영구보존회는 재단법인 통영충렬사로 개칭, 법인을 설립하고 충무공 유적을 관리하여 왔다.

1976년 정화사업을 위해 경남도에서 관리하게 되었고, 2000년부터 민간에 위탁관리하게 되어 통영충렬사에서 권리권만 수탁받아 수호관리하여 오늘에 이른다.

통영팔경 중의 하나인 한산도 제승당은 여객선 터미널에서 배로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충무공의 얼이 서린 한산도는 바닷바람도 쐬고 가벼운 산책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여유가 있다면 주변 섬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욕지도·소매물도·연화도·사량도 등이 여객선 터미널에서 배로 한 시간 거리 이내에 있다.

몇 년 전 방영되었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인기리에 종영되면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드라마가 성공하면 막을 내려도 촬영 세트장을 찾는 관광객이 줄을 잇지만, 이순신 장군의 드라마 촬영 세트장은 이곳 통영이 아닌 전북 부안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 눈으로 보는 관광 중심에서 오늘날은 즐기고 참여하며 가족이 함께하는 관광 추세임을 생각해 볼 때, 지역이 갖고 있는 관광 자원을 최대한 살리는 적극적인 개발과 홍보도 필요한 것 같다.

다행히 조선 후기 삼도수군의 본영이었던 통제영을 복원·보전하기 위하여 통제영지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통영시 문화동에 위치한 통제영시대의 객사인 세병관을 중심으로 주위의 총 42만9천700m²에 이르는 넓은 구역이다. 통영시는 앞으로 관아 30여동과 12공방을 이곳에 복원하고자 한다. 이번에 사적으로 지정된 통제영지가 계획대로 복원되면 이는 통영시민의 긍지를 드높이는 호국의 성지로 통영 관광의 명소가 될 것이다.

위상복(영남삶터탐구연구회·대구제일고 교사)

참고자료·삶터탐구활동길잡이(대구남부교육청)

▷임진왜란이 일어난 배경은 무엇인가?

조선은 오랜 평화와 성리학의 발전, 이민족에 대한 우월감으로 국방정책에 소홀하였다. 특히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무시하였으며, 양반 세력의 국론 분열과 조세 제도 문란으로 민심이 혼란하였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후 영토 팽창 야심과 자국 내 불만 세력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조선 수군의 승리 요인은 무엇일까?

이순신 장군이 지형지물과 환경을 면밀히 분석해 가장 유리한 시점에서 전투를 감행한 치밀한 전략이 돋보이지만, 기존의 수군과는 차원이 다른 함대를 만들었고 또 거기에 걸맞은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에 기적 같은 승리가 가능했다. 판옥선과 화포, 또한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순신 장군의 의지 등이 승리를 가져온 원인이다.

▷임진왜란의 영향을 알아보면?

국내적으로는 국토의 황폐화와 많은 문화재의 손실, 인구 감소와 백성의 유민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국외적으로는 문화적 후진국이었던 일본이 조선에서 활자, 서적, 그림, 도자기 등의 문화재를 약탈하고 학자와 기술자 등을 납치해 갔다. 이와 함께 조선의 성리학도 전해져,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에서는 조선과 명이 전쟁에 지친 틈을 계기로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한려해상국립공원

1968년 우리나라 최초의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공원의 범위는 남쪽 거제 지심도~여수 오동도에 이르며 6개 지구(거제·통영·사천·하동·남해·여수오동도)로 나눠진다. 전체 면적 545㎢ 중 해상면적이 72%를 차지하며, 해양과 도서, 육지가 빚어내는 아기자기한 지형경관이 뛰어나 매년 100만명 이상의 탐방객이 찾는다. 특히 통영 미륵산에서 바라보는 한려수도의 바다와 섬, 해안선의 풍경은 전국 최고의 수준이다.

▼세병관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통제영을 한산도에서 이곳 두룡포에 옮겨온 해인 1605년 준공한 통제영의 객사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팔작집으로 그 규모가 웅장하며 국보 제305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목조건물로서는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함께 규모가 가장 큰 건물이다.

▼충렬사

임진왜란 중에 수군통제사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충무공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사당에는 본전, 정문, 중삼문, 동·서재실과 강당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명나라 황제가 내린 8가지의 선물과 정조가 직접 지어 준 글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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