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입니다. 딸가닥 딸가닥 조심스러운 소음이 정적을 깹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귀를 쫑긋 세웁니다. 도둑?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아, 고양이! 다시 적막이 시작되고, 끊어진 새벽단잠이 아쉬워 눈을 붙입니다.
그러나 의식이 채 꺼지기도 전에 또 다시 소음이 이어집니다. 칙- 졸~졸~졸~. 아예 큰소리가 나면 그러려니 하고 잠을 청할 텐데 살짝살짝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는 더 참을 수 없습니다. 포기가 빠를수록 마음이 더 편한 상황, 과감하게 침대를 빠져나옵니다.
부엌에서 불빛이 새고 있습니다. 문을 밀치고 고개를 들이 밉니다. 화들짝 놀란 주인이 미안한 듯 아침인사를 건넵니다. "잠을 깨웠군요" 헝클어진 머리에 잠옷 차림, 손가락 몇 개를 물에 담그고는 쌀을 휘젓고 있습니다. "밥만 얹어 놓고 들어가려 했는데..."
농담 반 호기심 반으로 말을 건넵니다. "아침밥을 손수 준비하시는군요. 아주머니는 어디 가셨어요. 지난 밤 소박 맞으셨나 봅니다?" 씩 웃는 주인장의 대답이 가관입니다."지금 근무 중입니다"
남의 이야기 하듯 넋두리를 풀어 헤칩니다. 5년 전, 청운의 꿈을 품은 공학도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고 도버해협을 건넙니다. 넘치는 기개와 광대한 포부로 삽시간에 대영제국의 중심 런던을 평정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습니다. 공학도(工學徒)의 거창한 설계는 지상탄병, 공염불이 됩니다. 어느 날 문득 공학도(空學徒)가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마지막 밑천을 털어 증기압 연구에 몰두합니다. '오늘의 요리', '쉽게 만드는 밑반찬', '수험생을 위한 영양식' 등의 서적을 섭렵합니다. 몇 달의 시행착오를 거쳐 공인된 압력밥솥 운전기사 자격증을 획득합니다.
"국 맛이 어때요?" 마침 끓기 시작한 국을 한 숟가락 떠서 맛보길 권합니다. 뭔가 부족한듯 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육개장입니다. 집나온 처지, 먼 이국땅에서 이 정도의 한국음식을 먹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입니다. "very good" 흡족한 미소를 짓는 주인장의 시선이 벽면을 향합니다. 전리품, 나그네들이 남겨놓은 각양각색의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었습니다. 밥맛과 친절에 대한, 주인장의 인간성에 대한 그리고 방문한 영국에 대한 애정과 애증의 찌꺼기들로 가득합니다.
"나그네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할 수 있어 좋습니다." 지나가듯 이야기하는 주인장, 그에게서 진짜 진한 나그네의 향기가 납니다.
이정태(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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