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 책을 읽는다] 우리는 외투 안에 살고 있다

빼째르부르그 이야기/고골 지음/조주관 옮김/민음사 펴냄

때는 19세기의 러시아. 만년 말단 공무원인 한 사나이가 있었다. 초라한 봉급 탓에 빈빈한 생활을 하던 그는 언젠가부터 큰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입고 다니던 외투가 낡아서 못 입게 되었는데, 도무지 새 외투를 장만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생각해낸 해답은 결국 더 지독한 궁핍 속으로의 돌입이었다. 값 비싼 새 외투를 장만키 위해 그는 차 한 잔 마실 여유 없는 메마른 저녁을 보냈고, 촛불 한 촉도 켜지 않는 캄캄한 밤을 택했다. 심지어 속옷마저 미루고 미루어 세탁하는 지질한 궁상을 떤 끝에, 마침내 그는 꿈에 그리던 새 외투를 손에 넣게 된다. 의기양양, 맵시를 뽐내며 출근하여 동료들과 상관에게 축하를 받은 그는 날아갈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새 외투와 보냈던 꿈같던 시간도 잠시, 노상에서 그는 제 살가죽보다 더 중할 그 외투를 정체모를 불량배들에게 강탈당해 버리게 된다. 억장이 무너진 그는 경찰서장과 고위관리를 찾아가 읍소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대와 무시, 호통뿐이었다. 절망한 그는 결국 독감을 얻게 되고 한을 품은 채 쓸쓸히 죽어간다.

러시아 소설, 그 화려한 성채의 견고한 기반을 마련했던 작가 고골. 많은 이들에 의해 그의 최고작이라 불리는 단편'외투'는 대충 이런 내용이다. 판타지와 리얼리즘을, 비통과 해학을 동시에 추구하던 이 대작가는 이 단편에서도 무능하고 권위적인 제정 러시아의 관료주의와 그 속에서 무력하게 희생당하는 약자의 삶을 살갗에 와닿을 만큼 실감나게 그려낸다. 데뷔 무렵 '새로운 고골'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후에 '우리 모두는 외투에서 나왔다.'라고 말함으로써 이 선배 작가와 그 작가의 대표작에 최고의 경의를 표한 바 있다. '빼째르부르그 이야기'에는 '외투'외 4편을 수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훌륭한 문학이 그렇듯 '외투' 또한 '먼 나라의 남 얘기'만은 아니다. '외투'가 32평형 아파트로 바뀌고, '불량배의 위협'이 부동산 거품과 무분별한 주택담보대출의 리스크로 바뀌었을 뿐, 그 시대의 러시아 민중과 오늘날의 한국의 서민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미련하게 청춘 다 바쳐 장만한 그 '외투'가 똥값이 되는 것을 보게 되는 날이 와도, 그 억울함을 하소연 할 믿을만한 곳 하나 없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아직 외투 안에 산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가진 문학사적 가치를 제쳐 놓고서라도, 우리는 '고골'의 작품세계에 강한 동화를 느낄 만한 뚜렷한 근거를 가지는 셈이다.

박지형(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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