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상생의 땅 가야산] (33)심원골과 심원사

'海東 명당' 천년가람 골골이 청정 비경

상아덤에서 바라본 돈봉 능선과 심원골은 기기묘묘한 바위와 울창한 숲이 조화를 이루며 청정한 기운을 내뿜는다. 왼쪽이 심원골. 겨울과 여름에 보는 풍경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상아덤에서 바라본 돈봉 능선과 심원골은 기기묘묘한 바위와 울창한 숲이 조화를 이루며 청정한 기운을 내뿜는다. 왼쪽이 심원골. 겨울과 여름에 보는 풍경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300~400년 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심원사는 최근 복원이 끝나 천년 가람의 모습을 되찾았다.
300~400년 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심원사는 최근 복원이 끝나 천년 가람의 모습을 되찾았다.
여름에 촬영한 심원골.
여름에 촬영한 심원골.

인자(仁者)나 군자(君者)의 덕이 뛰어남을 높은 산이 솟고 큰 강이 흐르는 데 비유한 산고수장(山高水長)! 사람을 두고 이 말을 적용하는 게 보통이지만 산을 의인화(擬人化)해 이 표현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야산은 산고수장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1천433m에 이르는 칠불봉을 비롯해 타오르는 불꽃 모양의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있고, 백운동과 홍류동 등 맑고 아름다운 계곡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땅의 덕(地德)이 해동 제일'이라는 옛 기록들도 가야산이 산고수장한 곳이란 사실을 여실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수장(水長)에 해당되는 가야산의 여러 계곡과 골짜기 가운데 빠트려서는 안 될 곳이 심원골이다. 잣나무가 무성했던 심원골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잘 보존돼 있고, 명당자리로 이름난 터에 심원사가 복원돼 있다.

#조망이 일품인 심원골 등산로!

심원골 코스는 1987년 백운동 지구가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조성된 등산로다.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만물상 능선을 사이에 두고 북동쪽에 용기골, 남서쪽에 심원골이 자리를 잡고 있다. 울창한 숲과 계곡, 그리고 능선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뛰어난 심원골 등산로는 한때 인기가 높았으나 요즘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수풀이 많이 자랐다. 자연휴식년제 시행으로 입산이 통제된 이후 원형 그대로의 숲을 잘 유지하고 있다.

심원골 산행은 가야산국립공원 백운동지구 주차장 왼쪽의 진입로를 따라 시작하는 게 대부분이다. 산길은 넓고 뚜렷해 쉽게 찾을 수 있다. 주차장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낙엽송 숲이 시작되고 길은 왼쪽으로 휘돌며 계곡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겨울이어서 계곡 곳곳에는 얼음이 얼었다. 계곡 좌우로 우뚝하게 솟은 암봉들이 기골이 장대한 사내들처럼 도열해 있다.

등산로 초입에서 300m가량을 걸으면 심원사가 나온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성주쪽 전망이 일품이다. 낙엽송 사이로 보이는 탁 트인 풍광이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심원사 오른편 이정표에는 심원사에서 가야산 정상 칠불봉까지 3.6㎞라 표시돼 있다. 심원사를 지나 계곡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작은 샘이 나타난다. 그 이후부터는 길이 가팔라진다. 전형적인 계곡 산행으로 능선에 올라설 때까지 마땅한 조망처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샘터에서 주능선까지는 약 40여분 거리. 부지런히 걸으면 등산로 초입에서 상아덤 밑 주능선까지 1시간 정도가 걸린다. 상아덤부터는 서성재를 거쳐 칠불봉을 오르는 코스로, 용기골에서 오르는 등산로와 서성재에서 만나게 된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심원사!

심원골의 이름이 유래된 심원사는 가야산 남동쪽 해발 600m 지점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조선사찰전서' 등에는 심원사(深源寺)로 기록돼 있으나 '경산지(京山志)'에는 심원사(尋源寺)로 나와 있다. 고려 말 관료이자 학자인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기심원장로(寄深源長老)'라는 시에는 '심원고사재야산(深源古寺在倻山-심원사 옛 절은 가야산에 있는데)이란 구절이 있다. 이로 미뤄 고려시대에 이미 심원사는 고찰로 불릴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숭인의 심원사를 배경으로 한 시에서 옛 심원사 모습을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릴 수 있다. '오래된 심원사가 가야산에 있는데, 소나무 잣나무 숲 속에서 빗장도 걸려 있지 않네. 능엄경을 갖고 가서 깊은 뜻을 묻고 싶지만, 이 몸이 언제나 한가할 수 있을지.'

심원사의 창건 연대는 법수사와 같은 시기인 8세기쯤으로 추정된다. 2001년 중앙승가대학 사학연구소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가람배치인 삼금당지가 제5축대에서 발굴돼 구전돼 내려온 이야기를 뒷받침해줬다는 것. 가정(嘉靖·1522~1566)에 지원(智遠) 스님이 크게 중수, 그 규모가 크고 굉장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실화로 인해 1593년에 심원사가 불탄 후 다시 중건했다. '경산지'에는 "잣나무 밭이 남쪽 동불암에서부터 심원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10리에 걸쳐 있었다. 만력(萬歷) 계사년(1593) 봄에 의병들이 실화해 심원 일대까지 불타는 바람에 거의 씨도 남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조 23년(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考)'에는 심원사가 폐사로 기록돼 있어 1600~1700년 사이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복원된 심원사!

폐사됐던 심원사를 꿋꿋하게 지켜온 것은 절의 삼층석탑이었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보여주는 이 탑은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16호로 지정돼 있다. 무너져 있던 것을 1989년에 복원했다. 탑의 높이는 4.5m. 상륜은 없어지고 각 층의 옥신석과 옥개석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하층기간에 비해 상층기단이 높은 편이고, 전체적인 석탑의 구조가 안정적이다.

2001년 심원사 터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유물은 중앙승가대학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대부분 유물이 항아리, 기와조각, 백자제기, 백자접시 등이다. 도깨비무늬 기와, 음각한 물고기문양 기와, 여러가지 수막새와 암막새, 불상의 배후에 광명을 나타낸 의장인 광배를 탁본한 광배탁본 등이 출토돼 심원사의 규모가 작지 않다는 것을 입증해줬다.

폐사가 됐던 심원사는 2001년 발굴조사 이후 복원의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2004년에 삼층석탑을 지금의 관음전 옆(심원사 중앙)으로 옮겼고 관음전과 문수전을 복원했다. 지난해에는 주법당인 대웅전 복원도 마쳤다.

만물상과 돈봉 능선을 뒤에 두고, 성주의 너른 벌판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잡은 심원사. 대웅전 앞에 자리 잡은 삼층석탑과 대웅전의 추녀,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만물상 능선이 한데 어우러져 빼어난 풍광을 선사한다. 나아가 심원사는 불자들에게는 마음의 안식처, 가야산을 찾은 등산객들에게는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협찬:경상북도, 성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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