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십년 정도 살다가 모국을 찾은 이들은 대개 자신이 살던 도시에서도 길을 잃기 십상이다. 한국사회가 그만큼 빨리 변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십년이 아니라 수년만 지나도 몰라볼 정도로 사회가 변하고 있다. 이러한 '빨리빨리 문화'가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가져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언제까지 그 속도의 논리로만 버틸 수 있을까.
숭례문이 탔다. 그것도 소방차들이 장사진을 치고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러졌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600년 역사가 소멸한 것이다. 문화재청, 소방당국, 서울시 중구청 등 책임공방만 난무하는데 완벽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전공분야인 문화재 쪽의 문제점을 짚어보자. 1960년대 개발시대에 일본의 문화정책을 받아들여 토씨만 고친 문화재법을 만든 지 50여년이 되었다. 문화재관리국에서 문화재청으로 속도전식의 진화 발전을 하였지만 옷만 커졌지 몸뚱어리, 즉 청 규모에 걸맞은 의식변화는 없는 상태였다.
문화재청은 물론 중앙박물관 조직도 그야말로 '먹겠다'는 논리만 전개하고 있을 뿐, 제 역할은 등한시하고 있다. 문화재청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문화재의 보존과 전승이다. 그야말로 기본에 충실해야 하는데 기본을 망각하다가 사단이 벌어졌다. 낙산사가 불에 탔는데도 방재대책 하나 제대로 세우지 않았고 문화재청장은 동종에 자신의 이름이나 써놓았다가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미술사가가 아니라 사실 미술평론가 출신으로 베스트셀러만 내었지 수많은 문제점을 애초부터 갖고 출발한 유홍준 청장은 왕릉에서 고기 구워먹기, 경회루에 가스통 갖다 놓고 파티하기 등 연출할 수 있는 모든 문제점을 드러냈다. 사건은 예견되고 있었던 셈이다.
숭례문이 불에 타자 2, 3년 내로 복원할 수 있다는 식의 발언들이 난무한 것도 '빨리빨리' 문화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음을 웅변해줄 뿐이다. 정부청사 국무조정실이 불에 타서 공문서를 태우고 겨우 진화되었다. 정부의 핵심 중의 핵심부서들이 들어선 정부청사가 이 정도니 말해 무엇 하랴. 숭례문, 정부청사, 그 다음 수순은 무엇일까.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가 영어몰입 사건을 필두로 묘한 징조를 연출하면서 숨가쁘던 2개월여의 역할을 마감하였다. 인수위를 둘러싼 이런저런 뒷소문들도 조급증 때문에 발생하였다. 무턱대고 영어몰입을 내걸고 오렌지냐 오린지냐로 장안의 화제가 되고, 인사청문회도 거치기 전에 투기와 논문표절 의혹 등으로 잡음이 쉬지 않고 있다. 이런 풍경들을 바라보려고 국민들이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을까.
신정부도 산적한 우리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을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더 이상 속도를 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총선 때문에 속도를 내야겠다는 생각에 빠지면 더욱 위험하다. 국민들도 조급증을 내서는 안 된다. 천천히, 천천히 가야 한다. 기본부터 지키지 않으면 노무현 정부 이상의 혼란이 올 것이다. 정부조직 개편도 무턱대고 밀어붙이다가 정부축소라는 이름과 무관하게 대충 모양새만 갖추는 꼴이 되었다. 보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국민들의 동의를 받았다면 별 문제없이 개편할 수도 있었고 후유증도 줄었을 것이다. 기본을 지키는 정부, 기본에 충실한 사회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다. 숭례문 불꽃을 바라보며 자신의 기본부터 반성하면서 거듭 '기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령, 기본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면, 금년 봄에는 어쩌면 또다시 대형산불이라도 나서 우리를 불구덩이로 밀어 넣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여름에 태풍이라도 와서 혼란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이 불길한 예감을 늘어놓는 이유는, 한국사회가 너무도 기본을 지키지 않는 위험사회이기 때문이다. 대구지하철 참사 등을 기억하는 이라면, 기본을 지키자는 주장을 한갓 교과서적 언표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주강현(한국민속문화연구소장)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