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2월 26일, 유엔 3차 총회에서 남한에서만 단독으로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앞서 유엔은 남북한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 실시를 결의했었다.
하지만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이 남한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소련이 이를 거부함에 따라 선거가 실시되지 못했다.
전국적인 총선이 어려워지자 미국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남한의 우익진영은 남한 단독총선을 추진했고 미국이 남한 단독총선 제안을 유엔총회에 회부했다. 결국 유엔 총회는 공산권의 기권 속에 33대 2로 단독총선안을 가결했다. 유엔총회의 결정이 발표되자 미 군정과 이승만 박사를 비롯한 우익진영은 크게 환영했다.
반면에 김구 선생 등은 단독총선이 남북 분단을 고착시킬 것이라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고 총선 불참을 선언했다. 이후 김구 선생은 '38선을 베고 죽을망정 가야 한다'며 4월 19일 방북길에 올랐으나 상황 반전에는 너무 때가 늦었다. 이런 가운데 5월 10일 남한의 단독총선거가 실시됐다. 좌익진영은 선거 반대를 위해 5·8파업으로 맞섰으나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총선으로 남한에선 198명의 당선자가 탄생, 제헌헌법 제정과 정부수립 등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조인 ▶1801년 우리나라 첫 천주교 신자 이승훈 순교
정보관리부 이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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