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김춘수의 '시론' 강의는 유명했다. 내가 입학했을 때는 이미 경북대에서 강의를 하지 않으실 때였기 때문에 직접 강의를 들은 적은 없지만 시를 좋아하던 선배들은 자주 김춘수를 회상했다. 대학에서 행한 그의 강의는 언제나 명강의라고 했다. 국문학과 전공 강의인 '시론' 시간에는 학년 정원의 3배를 웃도는 수강생으로 북적였으며 늘 시간이 끝나는 것도 모르고 강의를 계속해 다음 시간의 교수를 복도에 오래 세워 놓기도 했다는 말도 들었다. 제5공화국 출범과 동시에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어 정계로 진출한 뒤 그는 어느 신문기자와의 대담에서 정치와는 관련이 없던 시인이 의원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내게 있어 시는 최선의 도덕적 결백을 위한 윤리요,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정치란 최선을 우선하다 차선, 삼선의 여지로서 운영되는 현실에 대한 나의 참여이다"라고 자신의 견해와 입지를 밝히기도 했다. 시인이요, 교수요, 국회의원이기 이전에 인간 김춘수는 겉으로 보기엔 차갑고 냉담한 느낌의 외모를 가졌지만, 드넓은 통영 앞바다를 사계절 지켜보며 자란 까닭인지 깊고 담담한 인품과 경상도 남자답게 표현에 능숙하지 못한, 조금은 어수룩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한사람의 인간이었다. 김춘수는 통영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라난 귀공자였다.
청마문학관 바깥에서만 서성이다가 다시 차를 돌렸다. 다시 남망산을 끼고 돌아 도착한 네거리. 수많은 골목길 그 어딘가에 김춘수 시인의 생가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주소만으로 어렵게 찾은 생가. 철제로 된 나지막한 작은 대문에는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물때가 가득 묻어 있었다. 작은 대문이 열려 있었다. 특별한 것이 전혀 없는 평범한 도시 소시민의 집. 작은 화단에는 자정향(라일락) 향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개 한마리가 따라오며 연방 짖어댔다. 거실의 창문이 열리고 아주머니 한분이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가 김춘수 시인의 생가가 맞는지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무표정하게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창문을 닫았다. 아마도 그동안 제법 방문객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사실 지금 일상을 살고 있는 그들에겐 예정하지 않은 타지인의 방문이 다소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방문단은 함께 김춘수의 '처용단장'을 읽었다.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 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南)쪽 바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김춘수, '처용단장(處容斷章)Ⅰ의 Ⅱ' 전문)
처용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인물이다. 하지만 김춘수에게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삼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고 했다. 물론 삼월에 눈이 올 수 있다. 그러한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고 했다. 물론 그럴 수 있는 진술이다. 그리고 겨울의 어두운 이미지를 '겨울 털옷'이라고 했고, 봄이 오고 있는 현상을 '일찍 눈을 뜨는 남쪽 바다'라고 했다.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는 아주 이질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이러한 시를 맥락에 따라 사실적으로 해석을 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닐 뿐이다. 바로 절대적인 이미지이다. 이러한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는 시는 말 그대로 바로 거기에서만 절대적인 현실로 존재한다. 이미지가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그 자체로 존재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시는 읽는 그 자체에 즐거움이 있다. 김춘수는 '처용'하면 떠오르는 그림들을 그냥 나열한다. 이때의 '처용'은 이미 과거의 처용이 아니다. 절대적인 이미지로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처용'은 늘 시의 본질만을 찾아 몸부림쳤던 김춘수 자신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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