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술 이야기]소주의 탄생

페르시아에서 처음 만들어진 증류주의 동방 전파는 몽고 1206년 징기스칸의 서역(호라즘제국) 원정 때 연금술사였던 증류기술자를 잡아 온 데서 비롯됐다. 징기스칸이 페르시아 원정 때 증류법을 배워옴에 따라 사료에는 소주가 원나라에서 시작됐다는 기록이 있다.

명나라의 황정일이 쓴 '사물감주(事物紺珠)'에는 원나라 사람이 마시던 술이란 기록도 있다. 일본고서 '오함아집'에도 소주를 '아라키주'라 적었다.

증류주의 아랍어인 '아라그(Alag)'를 몽골어로 표기하다 보니 '아라키'가 됐고, 만주어로는 '알키', 한국어로는 '아락주'라 하였다. 지금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서는 소주를 '아락주'라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 일부 지방에서는 소주를 '아랭이' '아래기' '아래이' '아랑주'로 부른다. 아랍어 알락은 영어로 주정을 뜻하는 알코올의 어원이 되었다.

페르시아의 소주 증류법이 동방으로 와서 '아리키'가 되고 12세기 십자군의 영향으로 유럽 쪽으로 가서는 포도주를 증류한 '브랜디'와 맥주를 증류한 '위스키'를 낳게 됐다.

우리나라에 소주가 들어온 시기는 고려 충렬왕 때라고 한다. 당시 온 세계를 휩쓸던 몽고군이 고려를 발판으로 일본정벌을 위해 전초기지로 삼은 개성과 안동 지방에서 추위를 이기고 전투력을 높이는 자극제로 아라키주를 가죽병에 담아 허리에 차고 다니며 수시로 마셨다.

안동과 개성에 주둔한 몽고병사들에게 아라키주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것이 우리 소주의 뿌리이다.

1274년 소주 도입 초기에는 일부 고위층만 마셨으며, 고려 말기에는 여염집까지 번져나갔다. 고려 말 무신 김진 대장이 왜구를 막겠다며 경상도에 주둔하면서 매일 참모들과 기생을 끼고 소주를 마셨다고 하여 백성들이 '소주도'라고 비꼬았다는 내용이 '고려사열전'에 기록돼 있다.

조선조 초반에는 주로 약용으로 사용됐으나 선조 이후에는 상류 또는 관료 사회에 은근히 나돌며 사치스런 술로 취급되면서 선비나 젊은 관료들로부터 규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조 500년을 거치면서 소주는 지방에 따라 특색 있게 소주로 발전했는데 육회를 안주 삼아 따끈한 밥자배기 뚜껑으로 마셔야 제 맛이라는 '안동소주(安東燒酎)'를 비롯해 황해도 선비들의 과거시험 뒷바라지를 위해 그 부인들이 빚어 팔았다는 '공덕리소주', 배와 생강즙으로 제조한 '이강주', 남도의 대나무 명산지에서 만든 '죽력고', 관서의 명주인 '감홍로', 귀양 온 선비의 한을 풀어준 진도의 '홍로주' 등이 유명하다.

소주의 제조방법도 또한 가문과 지방에 따라 다르게 발전했는데, 소주를 대나무통 속에 묵혀뒀던 '죽통로', 살아있는 소나무 밑둥을 파고 소주를 묵힌 '와송로' 등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는 서양인들이 위스키나 브랜디를 오크통에 숙성시킨 것과 유사한 것. 증류방법도 발전을 거듭, 단증류한 소주를 '홍로'라 하고 재증류한 소주를 '감홍로'라 했다.

신영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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