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장님] 상주시 화남면 임곡리 이장 전해웅씨

실도랑 사이 경상·충청 두마을…행정구역 달라도 우린 이웃사촌

▲실도랑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와 충청도로 갈라진
▲실도랑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와 충청도로 갈라진 '임곡리'. 상주시 화남면 임곡리에서 20년 가까운 세월 마을 일을 맡아보고 있는 전해웅(71) 이장이 충청도 임곡리와 얽힌 얘기를 하고 있다.

수백년을 함께해 온 이웃과의 정을 갈라 놓고 있는 작은 실개천 하나가 요즘 들어 더 넓게 보인다. 이웃사촌으로 길흉사를 내 집안일처럼 거들었던 이웃들이 이제 조금씩 서먹서먹해지는 것 같아 때로는 가슴이 먹먹하다.

실도랑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와 충청도로 갈라진 '임곡리', 수십여 가구가 대대로 함께 살아오고 있지만 행정구역은 경상북도 상주시 화남면 임곡리와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 임곡리로 나뉘어 있다. 경상도 마을에서 20년 가까운 세월 마을 일을 맡아보고 있는 전해웅(71) 이장.

속절없이 가버린 세월이 아쉬운 듯 먼산을 바라보고 선 그의 얼굴에는 여느 이장들에게 느낄 수 없는 특별한 애환이 스며있다. "그 세월을 어찌 말로 다해. 도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경상도 사람' '충청도 사람'하며 살아왔지. 사립문만 열면 부딪치는 이웃이었는 걸···."

전 이장은 이쪽저쪽에서 혼사라도 있을라치면 양쪽 혼주들이 서로 다른 결혼 풍습을 의논하며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기억을 들려준다. 예로부터 친인척들이 함께 살았던 터라 지금도 정월보름이면 양쪽 마을 사람들이 함께 앞산 꼭대기에 올라 한해의 평온과 풍년농사를 비는 산신제를 지낸다. 가뭄이 들면 기우제도 함께 지낸다. 제주와 유사도 지역 구별없이 뽑고 음식도 공동으로 장만한다.

그런데 문만 열면 보이는 집들이지만 행정구역이 달라 전화를 걸때는 지역번호를 눌러야 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경상도 전화와 충청도 전화를 동시에 사용하는 주민들이 많다. 자식들 상당수가 충청도 쪽으로 나가 살기 때문이다.

"내가 이장을 처음 맡을 때만 해도 그저 가까운 곳에 나가 장보기를 하고 아이들 학교도 보내고 그랬지. 시골 사람들이 뭐 행정구역을 아는가? 그런 가운데 마을 대소사를 챙기고 이웃들간의 사소한 다툼을 해결해 주는 일이 이장의 역할이었지."

전 이장은 행정구역이 달라서 생기는 불편이나 불만은 없었다고 했다. 상주 화남면 소재지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진입로가 없었던 1980년대 중반에는 양쪽 마을 주민들이 길을 뚫는데 함께 나섰다. 도로 부지에 접한 땅을 선뜻 내놓았고, 땅이 없는 주민들은 보리쌀 두어말로 힘을 보탰다. 하지만 지금도 길이 가팔라 큰 차량은 보은쪽으로 돌아와야 한다.

"행정구역이 다른 게 요긴하게 쓰일 때도 많았어. 왜정때 징집 나오면 도랑 건너 몸을 숨겨 피할 수 있었고, 밀주나 땔감용 장작 불법 간벌 단속 때에도 술통과 장작을 개천 너머로만 옮겨 놓으면 그냥 넘어 갔으니까."

이렇듯 한 이웃으로 정겹게 살아온 이들에게 '지방화 바람' 이후 조금씩 반목과 경쟁심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잠은 경상도서 자고 물은 충청도 물을 먹는다'는 말도 그렇다. 2003년 상주시가 마을 간이상수도를 설치하면서 지하수가 고갈돼 충청도쪽 지하에서 끌어올린 원수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충청도 마을 주민들은 관정을 파지 못해 계곡에서 내려오는 자연수를 마시고 있으니, 은근한 불만이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노인회관을 둘러싸고 서먹함이 더해지고 있다. 지난 수년간 상주쪽 마을 한 가운데 지은 노인회관이 경상도 충청도 구별없는 노인들의 쉼터였다.

하지만 충청도쪽 노인들이 마로면을 찾아 노인회관 신축을 요구했고, 상주 노인회관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언덕배기에 단층 보은 노인회관이 들어선 것. "그후로는 저쪽 노인네들이 조금씩 이쪽 발길을 끊는거야. 마을 분위기가 점점 이러니 이제 이장 노릇도 힘들어질 수밖에···."

전 이장은 주민들의 요구도 예전과는 달라졌다고 한다. 보은에서 마을 안길포장과 화장실을 지어주자, "상주는 왜 안해주느냐"며 "이장이 가서 좀 따지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보은군이 비료 1포대씩을 지원해주자, 주민들에게 떠밀려 면사무소를 항의 방문한 기억도 있다.

이렇게 자꾸만 지역간 갈등이 생기면서 주민들의 삶도 조금씩 팍팍해지는 분위기다. 내것 네것 없이 오순도순 살아가던 옛정이 그리울 따름이다. 전 이장은 머지않아 젊은 사람(50대)에게 이장 일을 넘겨줄 작정이다.

이웃의 보은 임곡마을에도 몇년 전 젊은 이장(47)이 마을 일을 맡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양쪽 마을의 젊은 이장들이 다시금 정이 넘치는 임곡마을을 만들어나가는 길을 터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상주·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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