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체험학습] 김해의 상징, 가야 수로왕릉

순장 풍습 따른 가야의 대표적 유물

가야(伽倻)는 가락 혹은 가락국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서기를 전후하여 영남지방에 위치한 가야는 전기(김해지역)와 후기(고령지역)의 시대로 나눠지며, 전기 가야는 낙동강 하류의 비옥한 농토에 위치한 김해를 중심으로 널리 퍼지다 5세기 초 거의 몰락하였고 5세기 후반 고령의 대가야국을 중심으로 후기 가야연맹이 형성된다. 하지만 서기 562년 신라가 고령의 대가야를 병합하면서 후기 가야연맹도 몰락하게 된다.

가야의 역사는 삼국이 건립된 시기(신라 기원전 57년·고구려 기원전 37년·백제 기원전 17년)보다 반세기 정도 늦은 시기이지만, 고구려가 건국될 당시 한반도의 남쪽에 형성된 삼한(마한·변한·진한)이 백제(마한), 신라(진한)의 단일국가 체계로 발전되던 시기와 그 맥을 같이한다. 백제와 신라가 중앙집권국가를 형성해 나가던 시절 변한은 단일국가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10여개의 소국과 별읍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 중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던 가야국은 2~3세기 변한지역의 전기 가야연맹을 형성하게 되고 그 가야국의 시조가 바로 수로왕이다.

가야는 관련 문헌이 거의 없지만 많은 유적을 통해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600년간 이어온 그들의 삶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 많은 유적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해의 수로왕릉과 철기 관련 유물이다.

이렇듯 문헌적 기록은 그 시기가 오래되어 남아있지 않다. 게다가 역사는 항상 전쟁에 승리하고 통일을 이룩한 왕조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전쟁에서 패배해 사라진 왕조의 기록은 소홀하여 문헌의 기록보다는 유적들로만 가야인들의 삶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 승자에 의해 파괴된 유적들이나 소실된 문헌들이 더욱 안타깝다.

수로왕은 서기 42년 6형제와 함께 6가야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이들은 초기에는 연맹국으로 상생하였다. 그러나 이후 연대가 내려가며 촌수가 멀어져 독립된 나라로 나눠지게 되고 수로왕 사후(死後) 가야의 중심세력은 김해에서 고령으로 옮겨가게 된다.

김해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은 재위 7년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을 받아들여 결혼하였고, 158세로 생을 마감하여 지금의 수로왕릉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이 왕릉은 순장(殉葬)풍습에 따라 능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며 김해시 서상동에 위치한다.

수로왕은 가락국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로 김해 문화유산의 상징으로 김해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수로왕릉에서 만난 이종호(고등학교 교사)씨도 김해를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보기를 추천하는 곳이 바로 수로왕릉이라고 할 만큼 김해에서 가야와 수로왕릉은 김해 시민들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하고 있다.

경칩(驚蟄)도 지난 3월, 봄기운을 느끼면서 김해의 수로왕릉과 주변의 많은 유적지, 관광지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김동식(영남삶터탐구연구회·원화중 교사)

참고자료:삶터탐구활동 길잡이(대구남부교육청)

◆수로왕릉에 대한 Q&A

▷가야는 어느 지방을 말하나요?

가야라는 명칭은 가락국과 동일한 뜻으로 쓰이고 있는 한편,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함안)·고령가야(진주)·대가야(고령)·성산가야(성주)·소가야(고성)·금관가야(김해)·비화가야(창녕) 등의 명칭이 나온다. '삼국유사' 기록은 대략 3세기 중반 이후에 변한지역의 12개국 가운데 일부 국가들이 가야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로왕릉과 왕비릉이 떨어져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수로왕은 대개 서기 42년에 즉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활동한 시기는 서기 1세기 중반에서 3세기 사이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부부합장묘라는 전통이 없었고 이에 따라 합장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기 전의 매장방식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수로왕은 마치 신라의 시조인 김알지처럼 설화적 인물로 파악하는 것이 좋다.

▷금관가야는 어떤 나라인가요?

금관가야는 시조 수로왕이 서기 42년에 나라를 세운 후 532년 즈음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할 때까지 10대 490년간 존속하였다고 한다. 가야, 남가야, 금관국, 가락국, 남가라 등의 이름으로 문헌상에 나타난다. 금관가야는 김해지역에 있던 변한의 구야국이 성장, 발전하여 서기 300년 무렵 성립된 나라로 철(鐵)을 매개로 한 대외교역권을 장악하면서 성장하였고, 김해를 비롯하여 부산, 창원, 진영 일대까지를 세력권으로 뒀다.

▷수로왕릉은 어떻게 보호되어 왔나요?

수로왕(재위 서기 42∼199년)의 무덤은 1천800년이 넘은 것으로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풍파를 겪었다. 이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높이 5m의 원형 봉토무덤으로 주위에 왕릉공원을 조성하여 보호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고려 문종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했던 듯 보인다. 그러다가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엽이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정비작업을 마친 후이다. '지봉유설' 기록에 따른다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추정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능이 도굴을 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현재는 정비작업을 통해 잘 보존되고 있고 발굴을 하지 않은 왕릉이다.

◆주변에 이런 곳도 있어요!

▷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은 김해 시내 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구릉상에 위치해 있다.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 공주로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의 왕비가 된 허황옥의 능으로 조선시대 고종 15년 보수돼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고 최근 주변이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형태는 원형봉토분이며 수로왕릉과는 2㎞가량 떨어져 있다.

▷봉황동 유적

김해시 사적 제2호로 철기시대 초기의 것으로 약 30m의 낮은 언덕 위에 이루어져 있다. 1920년부터 있었던 발굴 조사를 통하여 이 유적에 대한 문화적 성격과 연대의 개요가 밝혀져서, 선사시대의 유적지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일련의 발굴을 통해 이른바 김해토기라고 명명된 토기의 조각들이 가장 많고 도끼와 손칼 등의 철기가 발견되었다.

▷대성동 고분군

구지봉과 김해패총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며 길이가 300m, 높이가 20m에 이르는 고분군으로 1990년부터 3차에 걸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그 결과 금관가야 지배자 집단의 공동묘역으로 판명되었다. 고인돌을 비롯하여 널무덤(토광묘), 덧널무덤(토광목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등 가야의 여러 형식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입지조건이 좋은 구릉의 능선부에는 왕릉과 이에 상응하는 지배자의 무덤이, 경사면에는 보다 신분이 낮은 계급의 무덤들이 형성되어 있다.

▷국립김해박물관

1998년 7월 29일, 국립김해박물관은 고대국가의 하나인 가야의 문화유산을 집대성하기 위해 개관했다. 가야의 건국설화가 깃든 김해시 구지봉 기슭에 자리 잡은 이곳은 가야의 문화재를 집약 전시하고 있으며, 아울러 부산경남 지역의 선사시대의 문화상과 가야의 성장 기반이 된 변한(弁韓)의 문화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에서는 가야의 철제 무기와 공구, 이형 토기, 철 제작과정과 판갑옷, 교역을 통해 들어온 외국산 유물 등을 통해 가야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박물관에 전시된 가야 연표를 통해 삼국의 역사와 비교하면서 가야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으며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비롯하여 아라가야, 대가야 등 여섯 개 가야 소국의 위치와 역사, 문화적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진영읍 봉하마을

16대 대통령이며 퇴임 후 최초로 고향마을로 돌아간 대통령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가와 퇴임 후 머무를 공간을 마련해 놓은 고향이 바로 김해의 봉하마을이다. 대통령의 생가는 작은방 2개와 부엌으로 이루어진 슬레이트 지붕집이다. 생가는 현재 대통령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 살고 있지만, 주변에 조성된 대통령 고향마을과 더불어 김해의 새로운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대통령을 배출한 곳이라며 방문객 중 일부는 돌과 흙, 물을 떠가기도 한다. 퇴임 직전 봉하마을 건설에 대해 많은 언론의 관심을 사기도 했듯이 직접 찾아가 그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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