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기행] 김훈 '칼의 노래'

이순신은 아들 면의 죽음에 울며…

하늘이 파랗다. 아산 가는 길은 제법 멀었다. 수원 화성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천안IC에서 내려 아산으로 달렸다. 통제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먼저 달려간다. 아산 작은 마을에서 먹은 생선 정식도 무척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도착한 현충사. 넓은 주차장에는 드문드문 몇 대의 자동차만 보였다. 쓸쓸했다. 주차장 옆에 서 있는 바위에는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生卽死 死必卽生)'는 통제사의 말씀이 새겨져 있었다. 가로수 사이에서 비치는 햇살이 따스했지만 바람은 칼바람이었다. 내 마음의 흐름도 그랬다. 빨리 뵙고 싶다는 마음은 컸지만 겨울 현충사의 정경을 하나씩 마음에 새기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처음 들른 곳은 통제사의 생가였다. 생각보다 작은 집, 가재도구들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작은 방에서 지낼 수 있었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집 한쪽을 채우고 있던 대나무 숲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우물 너머 빈터에 놓인 오래된 단지들이 비치는 햇살에 반짝였다. 아늑했다. 낮은 담장 너머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채워져 있었다. 생가 오른편에는 통제사의 셋째 아들 면의 무덤이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던 날, 나는 업무를 그만두고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중략)젊은 날, 국경에서 돌아와 면을 처음 안았을 때, 그 따스한 젖비린내 속에서 뭉클거리며 솟아오르던 슬픔을 생각했다. 탯줄에 붙어서 여자의 배로 태어나는 인간이 혈육의 이마와 눈썹을 닮고, 시선까지도 닮는 운명을 나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송장으로 뒤덮인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그 하찮은 운명을 힘들어하는 내 슬픔의 하찮음이 나는 진실로 슬펐다.(중략) 낡은 소금창고들이 노을에 잠겨 있었다. 나는 소금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김훈, '칼의 노래' 부분)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부분이다. 문자에 머무는 나의 감동은 독특하다. 특히 죽음이 결부될 때, 터럭같이 가벼운 죽음이냐, 태산같이 무거운 죽음이냐 하는 식의 판단이 아니다. 옳은 죽음이냐 아니냐 하는 가치판단도 아니다. 나와 다른 차원을 살다간 위대했던 사람이 던져주는 감동은 오히려 절망적이다. 내가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삶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내 삶을 먼지처럼 가볍게 만든다. 그런데 통제사는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나를 걷잡을 수 없는 감동으로 밀어 넣었다. 그 감동 속에는 안도감과 함께 아마도 깊은 슬픔이 있었으리라. 면이 누워있는 언덕 위에는 여전히 칼바람이 불었다. 겨울 바람 속에 몇몇 통제사 골수 팬 이외에는 현충사는 사위가 고요했다. 묘 너머 소나무에 걸린 자연보호 안내 글귀가 쓸쓸했다.

언덕을 내려와서 현충사 본전으로 향했다. 큰 소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유명한 홍살문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경건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쓸쓸하게 재웠다. 거대한 본전 정면에 통제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건물 앞에는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묵념을 올리고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다. 여기까지 왔어도 내가 그분에게 드릴 수 있는 언어가 너무나 적었다. 정말 하찮은 내 삶이 쓸쓸했다. 내 쓸쓸함이 통제사를 만난 본질적인 감정이라는 것이 더욱 쓸쓸했다. 오랜 시간을 그리워했던 여기에 와서 단지 쓸쓸함만을 느껴야하는 내 보잘 것 없음이 다시 쓸쓸했다. 본전 앞뜰에는 하얀 눈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겨울 햇살이 비치는 먼 산은 삶에 지친 안개로 가득했다. 허락만 된다면 여기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통제사의 마음에 안겨 내 영혼의 보잘 것 없음을 달래고 싶었다. 바닥까지 가라앉아도 죽을 수 없었던 내 삶의 현재와 만나고 싶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 아래에서도 노을에 잠긴 소금창고 속에서 숨죽여 울었던 통제사의 슬픔을 진정 만나고 싶었다. 내 하찮은 삶에서 이루어지는 몇 가지의 판단이 옳은 것이 되도록 통제사에게 오랫동안 질문하고 싶었다. 향 연기가 눈에 들어왔을 뿐이라고 변명하면서 연방 눈가에 맺히는 물기를 손등으로 찍어내었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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