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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정의 독서일기]생명에 관한 아홉가지 에세이 / 박재현'이도흠 외

봄이 오고 있다. 툭, 툭 가지마다 터져 나오고 싶은 꽃망울들. 뾰족뾰족 솟아 나오려는 새싹들. 하늘 아래 저 땅이란 땅 나무란 나무는 지금쯤 얼마나 간지러울까. 봄은 생명의 현상적 측면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TV로 꽃 소식을 듣고 자연의 변화를 가슴이 아닌 머리로 먼저 접하게 되는 도시생활은 너무나 간접적이어서 봄이 와도 약동하는 생명에너지를 좀체 느낄 수 없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생명 결핍증' 환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요란스럽게 '웰빙'을 찾는 걸까. 하지만 개인의 '웰빙' 노력만으로 생명에너지가 온전히 채워지는 것이 아닐 터이다. 왜냐하면 '나'라는 낱생명은 '환경'이라는 온생명 안에 포함돼 있으므로. 온생명이 온전하지 못하면 낱생명 또한 온전할 리 없으므로.

일찍이 '온생명'론을 주창한 장회익 선생은 우주를 유기적 전체로 파악했다. 하나하나의 생명체, 즉 세포나 유기체 단위로만 보는 것이 생명에 대한 인식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풀은 풀이고, 나무는 나무이고,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다. 생명은 이처럼 절대적이고 단독적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다. 중요한 하나, 즉 '적절한 여건'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여건'이야말로 낱낱의 생명체들을 생명이게 하는 모체(母體)같은 것이라 한다.

과학문명은 이 '적절한 여건'을 무시했다. 더구나 유전공학은 생명을 사물화. 도구화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생명이 결핍될 수밖에 없는 시대인 것이다. 이 책은 생명 결핍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가장 절실한 화두가 돼버린,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교수신문의 '학술에세이' 수상 작품집이기도 한 이 책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다채로운 인문학적 사유들로 제법 신선하다.

생명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식이 있지만 대체로 동양사상에서 그것을 찾고 있다. 특히 도(道)와 중(中), 그리고 병생(竝生)에서 생명의 보편성과 유연성을, 불교의 공(空)사상에서 낱생명과 온생명의 소통가능성을 보여준다. 가령 이런 문장을 읽을 때면 맞아! 하면서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생명이 현현하기 위해서는 물질(몸)이 필요하지만, 생명이 온전한 생명으로 존속하기 위해선 외부와의 소통이 필수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생명은 내부이면서 동시에 외부가 아닌가. 우리가 몸이면서 동시에 정신이듯이. 몸은 어쩔 수 없이 닫힌 개체라 해도, 그러니 정신만은 온 우주와 소통할 수 있게 열어놓아야 한다. 자꾸 안으로만 조여드는 시각을 헐겁게 해야만 한다. 그래야 '나'는 나이면서 너일 수가 있다. 그래야 이 숨막히는 극단적 이기주의 시대를 빠져나갈 수 있고 나아가 지구생명의 미래까지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봄이 곧 당도할 것이다. 새싹을 피우고 꽃망울을 터뜨리기 위해 온 우주가 저토록 노력하고 있으니 글쎄, 대견한 봄 아닌가?

bipasor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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