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남자라면 모름지기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뜻인데 흔히 선비의 생활자세를 강조할 때 쓰이죠. 중국 춘추전국시대 죽간(竹簡)을 쓸 때 만들어진 말인 만큼 다섯 수레 분량은 책 권수로는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요즘으로 보면 500권 정도 될까요? 그냥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저는 술자리에서 이 고사성어를 한번씩 쓰곤 합니다.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죠. 질적인 면에서는 전혀 내세울 게 없지만 양적인 면에서는 제법 장담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전적으로 무협지 덕분입니다.
고교시절 하얗게 밤을 지새운 적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잠시 눈을 붙이면서 한질을 독파한 후 해 뜨길 기다리다 만화방으로 달려가던 시절이었죠. 우중충한 만화방 서가에 꽂혀있는 무협지들을 하나씩 훑어보면 너무나 황홀했고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가슴이 쿵쿵 뛰었습니다. 하늘을 붕붕 날고 산을 쪼개는 신공(神功), 어김없이 등장하는 기연(奇緣), 절세미인과의 짜릿한 로맨스까지…. 무엇 하나 놓치기 싫은 장면들이었죠.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삶을 동경했고 그들의 빛나는 의기를 사랑했습니다. 대만 작가 '와룡생'과 '진청운'을 우상처럼 숭배했던 그 당시를 떠올리면 그저 빙긋 웃을 수밖에 없겠죠. 무협지에 푹 빠진 이유를 뭐라고 딱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남자의 기상와 투혼을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80년대 대학에 다닐 무렵부터 무협지와 멀어졌습니다. 저질 작가들이 등장하면서 "파팡"(장풍 소리) "크악"(악당의 비명소리) 같은 의성어로 한 페이지를 채우는 무협지들이 많아졌지요. 천편일률적인 스토리에 싫증이 나기도 했지만 무협지 말고도 재미있는 것들이 주위에 널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연말 친척집에서 우연히 서가에 꽂혀있는 '묵향'과 '비뢰도'를 본 후 다시 무협지를 잡았습니다. 무려 20여년 만입니다. 탄탄한 스토리와 치밀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신무협'이라 불리더군요. 주말이면 집사람과 아이들의 눈총을 무시한 채 무협지를 붙잡고 집안에서 뒹굴뒹굴하며 보냅니다. 집사람이 "술 먹는 것보다 낫기는 한데…"라고 비꼬기도 하지만 당분간 무협지에 집중할 작정입니다. 왜 보느냐고요? 40대도 '꿈'을 먹고 살아야죠. 삭막하고 고달픈 시대를 살아가면서 황당무계함에 녹아있는 낭만과 상상력을 한껏 느껴보고 싶습니다. 주말 잘 보내십시오. 저보다는 훨씬 보람되게 주말을 보내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박병선 사회1부장 l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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