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고장인 영남에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이들이 유달리 많다. 고려 말 절의를 지킨 삼은(三隱)을 비롯해 세조의 왕위찬탈에 항거한 사육신과 생육신, 무수한 사화에도 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죽음으로 맞선 선비들까지…. 올곧은 정신과 높은 절의를 보여준 선비들은 후세인들에게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고려 말 인물인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성주에서 태어나 가야산과 밀접한 인연을 맺기도 한 도은은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킨 선비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또 고결한 인품,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과 학문, 그리고 맑은 정신세계를 표출한 시(詩)로도 유명하다. 특히 심원사 등 가야산을 소재로 한 그의 시는 속기(俗氣)가 없는 탈속한 경지를 보여줘 주목을 끈다.
◇야은 길재 대신 고려말 삼은(三隱) 추앙
고려 말 삼은이라 하면 흔히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꼽아왔다. 그러나 수십여년 전부터 야은 대신 도은 이숭인을 삼은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끈질기게 제기되고 있다.
사학자 이병도(1896~1989)는 삼은에 도은을 넣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얘기한 적이 있다. "도은이 문장가로서 목은, 포은과 함께 이름을 떨치고, 또 당시 함께 경학을 구하여 대성황을 이루고, 또 같이 수사(修史)사업에도 참여했던 만큼 이 삼은이야말로 당시 여말학계의 중진이요 거벽이었던 까닭에 그러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나는 여말삼은이라 하여 재래의 삼은과는 조금 달리 한 것이다"라고 했다. 호암 문일평(1888~1939)도 "세간에서 문장을 말하는 이 혹은 익재와 목은을 병칭하여 이이(二李)라고 하며 또 목은 포은 도은을 병칭하여 삼은이라고도 한다"고 평했다.
도은 이숭인(1347~1392)은 가야산 자락인 성주군 용산리(지금의 성주초교)에서 태어났다. 목은 이색의 제자인 도은은 어려서부터 문재가 뛰어나 16세에 등과(登科)한 후 포은과 함께 실록을 편수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명나라 황제는 도은이 지은 표(表)를 보고 "표의 문사가 참으로 간결하다"고 했고, 중국 사대부들이 도은의 저술을 보고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벼슬은 밀직제학,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등을 지냈다.
공양왕 4년인 1392년 포은이 선죽교에서 살해된 후 도은은 포은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당했고, 전남 남평(지금의 나주)에서 정도전의 심복인 황거정에 의해 장살(杖殺)당했다. 46세를 일기(一期)로 고려왕조를 위해 순절한 것. 도은의 제자인 태종 이방원은 스승의 죽음을 전해듣고 "도은의 문장과 덕망은 내가 사모해왔다"고 애통해했다.
◇도은 숨결 깃든 수륜면 청휘당
멀리 가야산 자락이 보이는 성주군 수륜면 신파동에 있는 청휘당(晴暉堂).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도은의 숨결과 혼이 깃든 곳이다. 우왕 2년(1376)에 북원(北元)의 사신을 물리치자는 상소를 올렸다가 고향인 성주로 유배된 도은은 청휘당을 짓고 후학들에게 인(仁)과 효(孝), 의(義)를 가르쳤다. 그 당시의 심경을 담은 청휘당 감흥사수(感興四首)가 전해온다. "화롯불 붉게 달아 장막안 따뜻하니 졸음이 짙게 밀려와/ 산봉우리에 가득히 눈이 펑펑 쌓이는 것도 몰라라/ 새벽녘 맑은 흥취 일어 문열고 나서면/ 신선세계 은빛 누리에 사람의 발자취 묻혔으리." 가야산이 바라다보이는 청휘당에서의 고아한 정취가 묻어나는 시다.
청휘당에는 선생의 영정을 모신 문충사(文忠祠)와 내삼문과 외삼문, 신도비 등이 있다. 도은의 문하생이던 태종 이방원은 후일 도은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諡號)를 내렸고, 문충사는 도은의 유업을 추모하는 곳이 됐다. 사당에 모셔져 있던 도은의 영정은 수년 전 도둑맞았고, 지금은 새 영정을 모셨다. 500여수의 주옥 같은 시문이 수록된 도은집 목판과 도은의 스승인 목은 이색이 쓴 기문(記文) 액자도 눈에 띈다. 태종 이방원은 권근, 변계량에게 도은의 유집을 발간 배포토록 했으며 금속활자로 도은집을 찍어내기도 했다.
◇맑고 신선한 詩風 동방 제일 평가
"동방의 제일"이라는 극찬까지 받은 도은의 시는 맑고 푸른 가야산처럼 청신(淸新)한 매력을 갖고 있다. 가야산 자락에서 태어나고 젊어서부터 가야산을 오갔기에 도은의 시는 가야산을 닮을 수밖에 없었다. 여말 격변기에 도은은 현실과의 갈등 속에 전원으로 돌아갈 것을 꿈꿔보기도 하지만 선비로서의 이상을 견지하며 꺼져가는 고려 왕조를 지키려 했고, 맑은 정신 세계를 시로써 승화시켰다.
"아득한 세모(歲暮) 하늘에/ 첫눈이 산천에 깔렸네/ 새들은 산중의 나무를 잃었고/ 스님은 돌 위에 샘을 찾네/ 주린 까마귀는 들 밖에서 울고/ 얼어붙은 버드나무는 시냇가에 누웠네/ 어느 곳에 인가가 있는지/ 저 멀리 숲에서 흰 연기가 나네." 억지로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맑고 깨끗한 경지를 잘 드러내는 도은의 시다. 가야산 자락에 쌓인 흰 눈과 밥짓는 연기가 나는 민가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하다. "도은의 시어는 씻은 듯이 깨끗하여 한점 티끌도 없다"는 목은의 말처럼 세속의 번잡함을 잊으려는 도은의 마음이 시에 담겼다.
시품(詩品)은 인품(人品)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가야산을 닮아 티끌없는 인품을 지닌 도은이 쓴 시들이 다시 가야산을 닮아 청신한 기풍을 뿜어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협찬:경상북도·성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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