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옥관의 시와 함께] 쿨럭거리는 완행열차/송종규

마스크를 낀 남자가 처방전을 내민다 백지 안에 박혀 있는 빽빽한 약들 그의 삶도, 모래알처럼 많은 순간 아프고, 열나고, 쿨럭거렸으리

베고니아가 입을 막고 재채기를 한다

마스크가 가린 한 세계의 저쪽

완행열차처럼 긴 세월이 창에 불을 켜고 빼곡한 약들 사이 빠져나간다 그 너머 너덜너덜한 광목천이 삼성자동차 운전학원을 연호하고 있다 완벽한 시설! 합격보장!

두 주먹이 불끈불끈 가로수를 쥐어박는다

너도 아프구나,

신호등이 기우뚱 이마를 짚는다

뭉게구름처럼 뭉쳤다가 다시 흩어지는, 마스크를 낀 한 무리의 사람들

나는 도무지 그들의 처방전을 이해할 수 없다

허공 모서리 길게

바퀴소리 새겨진다

현수대에 매달려 있는 광고물들이 소리를 친다. 붉고 푸른 글씨들이 온갖 사연으로 내지르는 고함소리. 날 좀 바라봐주세요, 제발! 제발! 그 현수막을 내건 이들의 마음을 떠올려본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고단한 삶인가. 세끼 밥을 위해 '모래알처럼 많은' 날들을 바지 밑단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돌아다녀야 하는 우리들의 삶. 마음을 다칠 일은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마스크'를 쓴 불가해한 이 삶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알약처럼 '빼곡한 날'들을 쿨럭이며 건너가야 한다. 누구도 쉽사리 처방전을 내밀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서로의 이마를 짚어주며 건네는 한마디의 위로, "너도 아프구나." 가만히 앉아 있어도 뼛골이 쑤시는 이 봄날, 시인이 지키는 약국에 가서 이마를 짚어주며 처방해주는 약을 나는 받아먹고 싶구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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