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 바이칼호를 떠도는 영웅 서사시

바이칼의 게세르 신화/일리야 N. 마다손 채록/양민종 옮김/솔 펴냄

멀고 먼 옛날.

인간들이 사는 지상은 낙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 세계를 양분하고 있던 동쪽과 서쪽 하늘 신들 사이에 처절한 전쟁이 벌어졌다. 동쪽의 악한 신들은 서쪽의 선한 신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승리자는 패배자의 몸을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잘라 지상으로 던졌다.

악신들의 조각난 몸은 마법의 힘으로 인간을 괴롭히는 나쁜 마법사와 정령들로 변신했다. 그날 이후 지상 세계는 가뭄과 홍수, 그리고 질병과 빈곤의 땅이 되고 말았다.

인간을 괴롭히는 나쁜 마법사의 무리를 응징하고 우주의 조화를 회복시키기 위해 위대한 영웅 '아바이 게세르'가 태어났다. 게세르는 지상에 내려오기 전에 이미 하늘 세계의 영웅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가 바로 바이칼 호수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는 게세르 신화의 주인공이다.

게세르 신화는 북방 민족 최대의 영웅서사시다. 지상과 우주의 조화, 평화를 위해 하늘 세계를 버리고 인간의 땅을 택한 영웅의 이야기로 알타이에서부터 티베트와 몽골초원을 거쳐 만주와 한반도까지 이른다. 바이칼 호수 인근에서 채록된 판본들만 해도 100여개가 넘으며 티베트와 몽골 인근에서 발견되는 것까지 합치면 그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이 책은 다년간 몽골과 시베리아 지역을 답사하며 중앙아시아의 민속을 연구해온 양민종 부산대 노어노문학과 교수가 여러 게세르 판본들 중 문학적 가치가 가장 높고 순수 구비문학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부리야트 게세르 판본을 번역하고 상세한 주석, 해제, 관련 논문을 엮어 낸 책이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 등 선학들이 바이칼 호수 일대의 우리 민족 문화의 발상지로 주목한 바 있다. 육당은 단군신화를 해명하기 위해 동아시아 고대 신화와 서사시 비교 연구가 관건임을 지적했고, 바이칼 호수 주변에 사는 부리야트의 '게세르'에 주목했다.

신기하게도 게세르 신화는 일연선사가 기록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단군신화와 닮은꼴이고, 한반도에 생명력을 이어온 샤머니즘 전통과도 맥이 닿아 있다.

게세르의 이름에 붙는 '아바이'는 함경도 방언 '아바이'와 마찬가지로 선조나 아저씨, 혹은 아버지라는 뜻의 높임말이다. 오늘날에도 남성 연장자의 이름 앞에 붙이는 일반적인 존칭이다.

현재까지 우리 민족의 기원과 형성에 대한 정설은 없지만, 유라시아 대륙의 유목민과 같은 혈통으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양 교수는 "게세르 신화는 부리야트만의 서사시가 아닌 단군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서사시의 원형으로 봐야 한다"고 적고 있다. 그렇게 볼 때 일연선사의 '삼국유사'에 남아 있는 단군신화는 게세르 이야기 가운데 공식 확인되는 최초의 게세르 신화 채록본인 셈이다.

지상으로 내려온 게세르는 배반도 당하고 자신보다 강한 적 앞에서 갈등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통 받는 인간을 위해 싸움에 나선다. 그 힘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바로 단군신화의 '홍익인간'이라는 이념인 것이다.

서구의 신화와 달리 우리와 유사한 정서와 세계관을 담고 있어 친근하게 읽을 수 있다. 복잡한 여러 신들의 계보와 신화에 대한 간단한 해제를 붙여 일반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북방의 신화를 통해 한민족, 알타이어계 역사와 문화를 재해석할 수 있는 상상력을 불어넣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480쪽. 2만5천원.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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