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 앤'은 희대의 스캔들이다.
권력을 쫓아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앤 불린과 그녀에게 눈이 먼 국왕 헨리 8세의 맹목적인 욕망은 숱하게 영화와 소설로 만들어졌다. 이번 주 개봉된 '천일의 스캔들'은 헨리 8세와 앤, 그리고 앤의 동생 메리까지 가세한 치열한 삼각관계로 풀어나간 것이 색다르다.
16세기 영국의 왕 헨리 8세(에릭 바나)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왕비 때문에 노심초사한다. 권력의 중심에 서기 위해 불린가(家)는 엄청난 음모를 꾸민다. 똑똑하고 당찬 큰딸 앤(나탈리 포트먼)을 붙여 헨리의 환심을 사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헨리는 착하고 순진하지만 결혼한 둘째 딸 메리(스칼렛 요한슨)에게 반해 버린다.
궁에 입성한 메리는 헨리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출산을 위해 누워 지내야만 하는 신세가 되고, 그 틈을 노려 앤이 다시 헨리에게 접근한다. 권력욕에 휩싸인 앤은 이제 왕비까지 몰아낼 야욕을 드러낸다.
조강지처인 캐서린을 버린 헨리 8세가 교황청과 등을 돌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궁녀 앤과 결혼해 이 후 영국의 위대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낳은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왕비가 된 앤은 아들을 낳기 위해 남동생과 관계를 맺으려다 결국 3년 만에 근친상간에 반역죄로 처형돼 '천일의 앤'으로 불린다.
영국 작가 필리파 그레고리의 동명소설에 기초한 '천일의 스캔들'은 '또 다른 불린가의 소녀' 메리를 등장시켜 불나방 같은 권력의 화신으로 남매를 그려내고 있다.
16세기 시대극 '천일의 스캔들'에서 볼 만한 것은 나탈리 포트먼과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 대결이다. 앤과 메리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자매다. 앤은 당돌하고 지적이고, 메리는 순수하고 헌신적이다. 앤은 시기심이 많고 저돌적이며, 메리는 버림을 받고도 헨리의 사랑을 믿고, 앤의 시기에도 관계를 회복하려는 연약한 여인으로 나온다.
둘은 가문의 명예에서 출발해 애증으로 흙투성이가 되고, 권력의 정점에서도 서로 상처를 주다 파멸하는 자매 역을 눈부신 연기로 보여주고 있다.
서로의 욕망에 의해 권력을 쫓지만, 둘은 철저한 희생자다. 영화는 앤과 메리 주변의 남자들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국왕에게 두 딸을 헌납하는 아버지, 그들을 사주하는 삼촌, 그리고 메리 덕에 궁의 일자리를 얻고 좋아하는 남편까지, 남자들은 하나같이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사꾼으로 표현하고 있다. "헨리가 몇 번 하더냐? 만족하더냐?" 등 남편 앞에서 차마하지 못할 말까지 강요하는 그들을 통해 영화는 권력에 희생된 자매의 불우한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신인 감독인 저스틴 체드윅은 마치 음모의 현장을 지켜보는 듯한 시선으로 이런 느낌을 더해준다. 관객이 답답할 정도로 카메라 앞에는 늘 방해물이 오락가락한다. 사람과 창틀, 차양막 뒤에서 훔쳐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드라마틱한 스토리에 빠른 전개, 주연 배우들의 불꽃 튀는 연기, 깔끔한 연출로 '천일의 앤'은 시대극을 넘어 젊은 관객도 즐길 만한 영화다. 15세 관람가. 115분.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천일의 앤' 과연 1,000일 일까
앤 불린은 1533년 1월 25일 헨리 8세와 결혼한다. 그리고 1536년 5월 19일 처형됐다. 3년 4개월로 1천일이 넘는다.
앤은 1533년 9월 7일 딸 엘리자베스 1세를 낳았다.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는 45년간 영국을 통치하며 국민으로부터 '훌륭한 여왕 베스'라고 불리며 경애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천하의 바람둥이 헨리 8세는 모두 6명의 왕비를 두었다. 첫 아내는 이미 죽은 형 아더의 아내, 캐서린. 두 번째 앤에 이어 세 번째 제인 시머와 1936년 결혼했지만 이듬해 사망하는 바람에 1540년 독일 뒤셀도르프 출생의 안나 폰 클레페(클레브의 앤)과 결혼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이혼하고 그해 다섯 번째로 캐서린 하워즈와 결혼했지만 그녀도 외도 때문에 앤 불린처럼 목이 잘렸고, 1543년 여섯 번째 왕비 캐서린 파와 결혼했는데 이것이 헨리 8세의 마지막 결혼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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