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법칙이 없는 고도의 심리전 '자백의 기술'

▲ 자백을 이끌어내는 방법은 범죄 유형·피의자 신분에 따라 다르다. 사진은 영화
▲ 자백을 이끌어내는 방법은 범죄 유형·피의자 신분에 따라 다르다. 사진은 영화 '박수칠때 떠나라'의 한 장면.

살벌한 분위기 속에 욕설이 난무하고 가끔 이단 옆차기도 등장한다. '원산폭격'(땅에 머리박기)은 기본이고, 긴 봉에 사람을 매달아 놓기도 한다. 범인으로부터 자백을 받아낸다며 등장하는 수단들. 물론 영화일 뿐, 요즘의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수사기관의 한 관계자는 "의욕이 앞서 욕설이나 폭력을 행사하다가 피의자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이라도 내면 끝장"이라며 "언성을 높일 수 있지만 폭언·폭력은 절대 없다"고 했다. 안양 초교생 살해 피의자 정모(39)씨는 완강히 부인하다가, 꼼짝 못할 증거 앞에 범행을 시인했다. 수사기관은 어떻게 피의자로부터 자백을 받아낼까.

◆저명인사 피의자, 자존심을 무너뜨려라

경찰 관계자는 "신문(訊問)은 고도의 심리전"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자백을 이끌어내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꺼렸다. 수사기법이 노출될 수 있는데다 범죄 유형이나 피의자 상태 등에 따라 대응법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딱히 정형화하기 어렵다고 했다.

저명인사에 대한 수사는 일반적 상황과 좀 다르다. 한때 수사기관에 몸담았던 A씨는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심리적 저항선이 높다. 이럴 때 가족이나 친구·지인 등을 참고인으로 소환하는 방법으로 압박을 가한다"고 했다. 가족을 옆에 둔 상태에서 면박을 주면 심한 모욕감 때문에 충격을 받고 웬만한 피의자는 눈물을 쏟아낸다는 것이다. 한 수사기관이 대구지역 자치단체장의 수뢰 사건을 조사했을 때, 돈을 제공한 사람이 입을 열지 않자 계좌 추적에서 의문점이 발견된 피의자의 아들을 사법처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경제계 저명인사였던 피의자는 결국 돈 준 사실을 털어놨고 단체장은 구속됐다. 지도층 인사에게는 일부러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오래전 일이지만 경제계 거물급 인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사기관 관계자가 신문지 한장을 말아 머리를 때렸다고 한다. 한 수사관은 의도적으로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고, 다른 수사관은 "저 친구가 워낙 성격이 급해서…"라며 달랜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신문인 셈이다.

◆불안 심리를 적절히 활용하라

공범 관계에 있는 두 피의자를 조사할 때에는 '심리적 불안감'을 자극하기도 한다. A피의자가 조사받는 과정을 문틈 또는 창문 너머로 B피의자가 볼 수 있게 한다. 범죄와 전혀 관계없는 내용을 묻기 때문에 A는 때로 진지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환히 웃기도 한다. 그런 뒤에 B에게 다가가 "다 밝혀졌다"고 말하면 혼자 범행을 뒤집어쓸 것이라고 걱정한 B가 자백하게 된다.

피의자의 허점 찌르는 기법도 있다. 소환된 피의자는 결코 자백하지 않겠다며 마음의 문을 닫고 조사에 임한다. 이 경우, 수사관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참고인 정도로 조사하는 것처럼 피의자를 대한다. 몇시간 별 일 없는 듯 대하다가 인적사항을 확인하거나 변죽만 울리는 질문을 하고는 돌려보낸다. 수사기관을 나선 피의자는 긴장이 풀려서 범행 관련자들에게 전화를 걸기 마련이다. 이 방법을 통해 수사기관은 피의자가 발뺌한 내용을 뒤집는 증거를 확보한다.

이런 일도 있다. 몇해 전 남매 어린이 3명이 실종됐다. 아버지의 신고로 경찰이 나섰는데 조사를 할수록 아이들이 살해됐으며 범인은 아버지라는 정황증거가 드러났다. 경찰은 차분히 증거를 수집한 뒤 신문에 나섰다. 밤 늦도록 조사가 이뤄졌지만 진척이 없었다. 밤참 시간에 라면을 제공했다. 형사들도 함께 먹었지만 내용물이 조금 달랐다. 형사가 먹는 라면은 스프 1개, 피의자의 것에는 스프 3개를 넣었다. 배가 고팠던 피의자는 그릇을 다 비웠다. 잠시 뒤 피의자는 갈증을 호소했다. 형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 모든 정황을 볼 때 당신이 저지른 게 맞습니다. 이제 털어놓고 시원하게 물 한 잔 하시죠." 한동안 갈등하던 피의자는 흐느끼며 범죄 사실을 털어놨다. 아내와의 갈등 끝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는 것이었다.

◆피의자의 기선을 제압하라

신문 장소도 중요하다. 대개 개방된 형사계 사무실에서 조사가 이뤄지지만 사안에 따라 별도의 신문실에서 피의자와 단 둘이 앉아 조사를 진행할 때도 있다. 둘만 있다는 안정감이 경계심을 풀어줄 수 있다는 것. 신문 때 앉는 자리도 계산 아래 이뤄진다. 피의자는 일부러 문을 등지게 한다. 문 뒤에서 누군가 갑자기 들어올 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다. 심리적으로 안정되면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가 제시되더라도 피의자가 거짓 증언할 여유를 갖게 되기 때문. 일부러 피의자에게 바짝 붙기도 한다. 개인 공간에 먼저 침범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다.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것도 중요하다. 청도군수 재선거 관련 금품살포 사건을 수사하면서 이 방법이 쓰였다. 금품살포 책임자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한 형사는 구체적인 살포 금액까지 거론하며 "장부에 기재된 돈과 돌린 돈이 딱 맞는데 왜 자꾸 아니라고 합니까? 사람까지 죽었는데 그렇게 거짓말을 해서 돌아가신 분을 욕보이면 되겠습니까?"라고 직접적인 질문을 쏟아부었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고개를 숙이며 갈등하던 피의자에게 다른 형사가 다가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다 밝혀졌습니다. 알고 물어보는 겁니다. 더 이상 마음 고생하지 마세요." 결국 피의자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한 뒤 범죄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수사기관 한 관계자는 "링 위에서 두 선수가 기 싸움을 벌이듯 용의주도한 피의자를 다룰 때에는 기선제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거나 욕설, 폭언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정황 증거가 뻔한데도 오리발을 내미는 피의자에게 감정이 북받치는 경우도 있고 때론 언성을 높일 수도 있지만 그 역시 수사기법이라고 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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