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상을 향해 외치다…외팔이 격투기 선수 최재식

지난 2005년 11월 열린 'K-1 코리아 MAX 2005' 개막전. 관중들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히트맨' 최재식(30) 선수가 전광석화처럼 날린 백스핀 블로(몸통을 뒤로 회전시키면 가격하는 것)에 일본의 가라테 챔피언 모리 킨지가 힘없이 고꾸라진 것. 관중들을 더욱 경악하게 한 건 최 선수의 오른쪽 팔꿈치 아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왼팔과 두 다리로만 싸워 통쾌한 KO를 거둔 셈. 이 경기는 무명의 파이터였던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장애를 딛고 일궈낸 승리' '외팔이 격투가' '신의 왼팔' 등 온갖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장애인 격투선수 최재식, 2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싸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는 요즘 링 위에서가 아닌 세상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있다. 지난 14일 충북 충주시 K무예타이 체육관에서 그를 만났다. 이곳은 그가 처음 무예타이에 입문한 체육관. 최 선수가 샌드백을 상대로 로킥을 날렸다. '뻑' '뻑'. 샌드백이 거친 비명을 질렀다. 쉬는 중이라 녹슬지 않을 정도로만 훈련을 한다는데, 역시 보통이 넘는다. 괜히 성질 건드려 좋을 것 없을 성싶다. "일반인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진 않아요. 그러려고 무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보통 제가 사과하고 넘어가죠." 그가 수줍은 듯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25전 17승 1무 7패 11KO'. 최 선수가 지금까지 남긴 전적이다. KO율이 64.7%에 이른다. '히트맨'이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다.

◆돌주먹, 세상과 만나다

팔을 잃게 된 어릴 적 기억부터 더듬어갔다. 알려진 대로 그는 6세 때 한쪽 팔을 잃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소 여물 자르는 기계를 마당에 둔 게 화근이었다. 기계에 오른 손목이 빨려들어가면서 팔꿈치 아랫부분을 영원히 잃었다. 격분한 아버지는 막내 아들의 팔을 앗아간 농기계를 부숴버렸고 농사를 그만뒀다.

원래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중·고교 때 태권도와 궁중무술, 합기도, 검도 등을 배웠다. 그가 딴 단증만 15단이나 된다. 왜 하필 그는 무술을 선택했을까.

"운명처럼 이어진 것도 있고요. 오죽하면 무술을 하겠어요. 사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지금도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제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싸움이에요. 저도 멈추고 싶어요. 어떤 때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어요. 이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남들보다 조금 불편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보일 줄 알았다. 하지만 희망은 좌절의 다른 이름이 됐다. 고교를 졸업하고 모 대학 무도학과에 원서를 넣었지만 '외팔이'라 안 된다는 기막힌 답변이 돌아왔다. "차별 때문에 대학에 떨어진 게 너무 분했어요. 그런데 스무 살이 돼서 사회에 나오니까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막노동을 하고 싶어도 제가 뛸 수 있고, 들 수 있고, 달릴 수 있는데도 일을 안 시켜줘요. 그렇게 목표 없이 방황을 했죠."

그를 돌려세운 건 태국 무술인 무예타이였다. 진학을 못해도 무술인으로 남고 싶었다. 2000년 10월 불과 입문 4개월 만에 링에 올랐다. 엄청나게 맞았고 3라운드에 KO패했다. 너무 많이 맞아서 3일간 병원 신세를 질 정도였다. 격투기가 무서워졌고, 1년을 폐인처럼 보냈다. "다른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어느 단계 이상 오르니까 재미도 없고 열심히 해도 목표의식이 없었죠. 무예타이는 달랐어요. 목표 의식이 생겼죠. 딱 한번만 이겨보자는…."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1년 뒤 열린 두 번째 경기에서 1라운드 2분 만에 KO승을 거뒀다. 그리고 연전연승. 예상치 못했던 행운도 잡았다. 그를 눈여겨본 홍영규 경북과학대 사회체육과 교수가 이종격투기과에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그리고 2005년 그토록 염원하던 대학 진학의 꿈을 이뤘다. 멋진 KO승으로 주목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2006년 열린 두대회에서 잇달아 KO패를 당했다. 패배가 거듭되자 대중들의 관심은 급속도로 멀어져갔다. 스폰서도 핑계를 대며 떠났고 '역시 안 되는구나'라는 조소도 들렸다. 다시 바닥에서 시작해야 했다. 그는 쓰린 속을 달래며 2006년 10월 태국으로 건너갔다. 100일간의 현지 훈련. 태국 무예타이 선수들과 부대끼며 뼈를 깎는 훈련을 거듭했다. 오전 8시부터 밤 12시까지 16시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훈련에 매달렸다. 이번이 아니면 안 된다 싶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의 눈빛은 예전과 달랐다. 더 독해지고, 더 매서워졌다. K-1 칸 2007 슈퍼파이트에서 승리를 거뒀고, 한국무예타이 웰터급 챔피언에도 올랐다. 최 선수는 "계속 여기저기서 띄워줬으면 자만심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며 "떠올랐다 추락하며 힘들었던 게 약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세상에 맞는 게 더 아프다

링과 현실, 판타지와 리얼리티. 판타지의 세계에서는 장애도, 차별도 없다. 링 위에서는 '외팔이'가 아닌 '격투가' 최재식일 뿐이다. "링 위에서는 바깥 세상과 달리 팔이 없다고 차별하지 않아요. 오직 두선수만 있는 것이고. 평등하죠. 세상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링이 정말 좋아요."

하지만 링에 오를 때마다 그는 늘 두려움에 떤다고 했다. "제가 지금껏 25번을 싸웠는데 무예타이 챔피언전 딱 한경기만 빼고 모든 경기가 무서웠어요. 심리적으로 불안했죠. 싸워야 하고 부서져야 하고. 특히 제 핸디캡 때문에 심리적 부담이 다른 사람들보다 컸던 것 같아요. 정말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어요."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최 선수는 "수준 차이가 나는 상대는 주먹이 너무 맵다"며 "속으로 '그만 때려 이 XXX야!'라고 울부짖을 때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꿈에 대한 열망은 두려움을 잊게 한다. 특히 지난해 한국 무예타이 웰터급 챔피언전은 열망의 정점이었다. 두차례 다운을 당한 탓에 판정으로는 도저히 이기지 못할 상태. 공이 울리기 10초 전 혼신을 다한 주먹이 강타했고 그는 TKO승을 거뒀다. "챔피언전은 꿈이었어요. 그 꿈만은 이루고 싶었고 물러서고 싶지 않았죠. 제 젊음을 불태워서 챔피언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진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링 위에서 맞는 주먹보다 더 아픈 건 세상이 때리는 주먹이다. 그를 둘러싼 차별과 편견, 오래도록 남는 마음의 상처는 좀처럼 치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스무살 때까지 반팔 티셔츠를 입지 못했다고 했다. 초교 2학년때 한 선생님의 말이 오래도록 상처가 된 탓이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반팔을 입고 등교한 어느 날, "너 반팔 입고 오니까 다들 쳐다보잖아. 보기 안 좋다"라던 한 선생님의 말 때문이었다. "누구도 장애인이 되지 말란 법이 없거든요. 항상 가능성이 있는 건데…. 그렇게 돌을 던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신을 둘러싼 선입견들도 아프긴 매한가지다. 자신이 남들과 다를 거라는 생각들, 편견들. "훈련을 어떻게 하느냐, 남들과 다른 격투 기술이 있느냐는 질문들을 하는데 그것 자체가 편견이에요. 남들처럼 훈련하고, 싸울 뿐인데 '너는 뭔가 다르게 할 거다'라고 보는거죠. 그리고 제가 여자친구 없을 거라는 것도 편견이에요. 하하."

최 선수의 오랜 징크스 하나. 가족들은 무조건 경기장 접근 금지다. "사실 무예타이 처음 입문하고 무지막지하게 맞았을 때 누나가 보러왔었거든요. 그게 너무 싫어서 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다음 시합 때 경기는 이겼는데 막판에 맞은 주먹에 고막이 나가고 토하고 그랬거든요. 끝나고 나와보니까 누나가 제 눈을 피해 차 뒤에 숨어있더라고요. 와서 본 거죠. 나 원 참…."

◆그래도 난 꿈을 꾼다

그는 요즘도 가끔 아침에 일어나면 팔이 다시 생기길 기도한다. 그저 꿈일 뿐이지만 그래도 팔이 다시 생겨서 딱 1년만 살아봤으면 좋겠다. "해외에서 손을 이식했다는 소식도 있던데, 저도 머지않았겠죠? 흐흐. 팔이 생기면 가장 잘하는 선수한테 전화를 해서 '나랑 한판 붙자' 딱 그러고 싶어요." 사실 팔이 생기면 그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부모님께 절을 한 뒤 꼭 안아드리고 싶어요. 제가 팔을 잃은 뒤부터 어머니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거든요. 더구나 몸도 성치 않은 아들이 격투기를 한다고 하니…." 그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요즘 그는 지도자로서 '제2의 인생'을 준비 중이다. 경기도 분당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체육관 개관을 준비 중인 것. 체육관을 낸 뒤 후배들을 육성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뒷받침이 부족해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제가 한손으로 해봤기 때문에 후배들이 제 말을 잘 따라준다면 2, 3배 더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체육관 개관을 준비하면서 시합은 당분간 보류 중이다. 기량이 녹슬지 않을 정도의 훈련만 계속하고 있는 상태. 지금은 힘이 약해져 있지만 이전보다 더 성장하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 "사실 그동안 운동만 하다보니까 저를 돌아보거나 관찰할 기회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쉬면서 저를 풀어내보고 과학적으로 기술의 세밀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단계가 온 것 같아요."

격투밖에 할 수 없어 링으로 내몰린 삶. 세상이 달라져 자신 같은 사람도 일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그는 기다린다. 그는 "최소한 장애인들이 생계를 이을 직업을 갖게 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이, 사람이, 법과 제도가 알게 모르게 장애인들을 사각으로 내몬다"고 토로했다.

머지않은 미래, 최 선수는 프로모터가 되는 것이 꿈이다. 뛰어난 선수를 모아 멋진 시합을 열고, 다른 프로모터 소속 선수들과 눈싸움도 하고. 그가 꿈꾸는 세상이, 팔이 다시 생겨야 가능한 미래가 되지 않길 바라는 건 다만 기자뿐일까.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 최재식은?

1979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다. 여섯살 때 농기계에 오른손목을 잃었다. 충북 괴산군 장연중학교와 충북 충주시 충원고교 시절 궁중무술과 합기도, 태권도, 검도 등 각종 무술을 배웠다. 대학 낙방 후 무예타이에 입문해 활동했으며 K-1에도 출전했다. 2006년 경북과학대(사회체육계열 이종격투기 전공)를 졸업했다. 종합전적 25전 17승 1무 7패 11KO.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