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중산층입니까?' 쉽게 답할 듯하지만 의외로 어려운 질문이다. 바꿔서 '당신은 부자입니까?' 또는 '당신은 가난합니까?'라고 묻는다면 훨씬 쉽게 답할 수 있다. 중산층은 엄청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중간 정도 계층을 말한다. 그러면 답은 쉬워지는데 그렇다고 막상 '나는 중산층이다'라고 답하려니 무언가 찜찜하다. '밑도 끝도 없는' 중산층을 찾아나서 보자.
◆나는 중산층이다.
부유층·중산층·서민층을 구분하는 흥미로운 질문 하나. 저녁식사를 끝낸 뒤 '배불리 먹었니?'라고 물으면 서민층, '맛있게 먹었니?'는 중산층, '음식이 보기 좋게 나왔니?'는 부유층이란다. 미국의 한 교육학자가 만든 기준이라고. 미국 사람들은 퇴근 길 피자 한판, 영화 한편, 국제전화 등에 별 생각없이 돈을 쓰는 사람을 중산층이라고 본다. 아울러 프랑스에서는 외국어를 할 줄 알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와 악기가 있으며 자신만의 요리가 있는 사람을 말한다. 1987년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는 '그렇게 잘살지는 못하나 아이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고, 체면치레할 만큼 교제도 하며 여름 휴가철 바캉스를 다녀올 수준'이라고 정의했다. 20여년이 흐른 지금은 해외여행과 스키, 와인, 중형 아파트(지역에 따라 다르지만)와 자가용을 포함하기도 한다.
중산층 비율도 들쭉날쭉이다. 2006년 8월 삼성경제연구소는 '중산층 비중이 1997년 64.8%에서 2000년 61.9%, 2005년 59.5% 등으로 감소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3월 코리아리서치센터는 '국민 중 42%가 중산층으로 인식한다'고 했다. 지난해 3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중산층이 1996년 55.54%에서 2000년에는 48.27%로, 2006년 상반기 43.68%로 줄었다'고 했다. 지난해 5월 삼성경제연구소는 '한국종합사회조사'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았다. '한달 평균 총 가구소득이 200만~499만원인 중산층 비중은 49%'라며 분석한 뒤, 하지만 '스스로 중산층에 속한다는 사람은 무려 74%에 이른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해 11월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는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기는 비율은 28%'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28%와 74%의 차이. 이것이 한국의 중산층이다.
◆나는 불안한 중산층이다.
앞서 통계치를 한마디로 풀어본다면 중산층이 줄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삶이 불안해졌다는 뜻이고, 그 불안감의 가장 큰 이유는 노후문제다. 국민연금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믿었지만 시행 20년도 채 안 돼 '고갈 위기'가 나타나고, '용돈 연금'이라는 비아냥을 듣게 됐다. 지난해 고갈 위기에 처한 국민연금을 대대적으로 수술한다며 보험료율은 9%로 유지하되 급여율은 현행 60%에서 40%로 낮췄다. 현재 200만원을 버는 가입자가 20년간 보험료를 냈다면 종전 체계에서는 월 54만원을 받지만 바뀐 체계에서는 36만원을 받는다. 보건복지부가 제출한 '2007년 국민연금 신뢰도 조사'에서는 국민 중 12.8%만이 '국민연금을 신뢰한다'고 밝혔다.
노후 불안감은 커지는데 정작 개인 저축률은 줄고 있다. 저축률은 수입 중 세금, 이자 등을 제외한 가처분소득, 즉 쓸 수 있는 돈 중 얼마나 저축했는가를 나타낸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계저축률은 1998년 23.2%, 2000년 9.9%, 2006년 3.5%로 떨어졌다. 전 세계 어느 국가보다 가파른 하락세다.
아울러 최근 4년간 개인파산 신청자는 90배 넘게 급증했다. 지난 2002년 1천300여명에 불과하던 개인파산 신청은 2006년 12만3천600여명으로 90배나 늘었다. 2007년엔 15만4천여명으로 전년보다 24.5% 늘었다.
가계 빚도 엄청나다. 2007년 말 우리나라 가계 빚은 630조원을 넘어섰다. 가구당 부채는 2006년 말에 비해 200만원 정도 늘어난 4천만원에 육박했다. 금융당국 규제로 은행권 가계대출은 줄었지만 고금리인 제2금융권(보험·카드·상호금융) 대출은 급증해 가계부채의 질적 하락만 부추겼다.
중산층 내 소득격차도 사상 최대로 벌어졌다. 지난해 6월 통계청 가계수지를 분석한 결과다. 가구당 월평균 소득을 10단계로 나눠서 3단계부터 8단계까지를 중산층으로 봤을 때, 중상층(3~5단계)이 벌어들이는 월평균 소득이 중하층(6~8단계) 소득의 1.662배에 이르렀다. 2003년 1.609배, 2004년 1.614배, 2005년 1.644배로 갈수록 커졌다.
◆나는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부동산 투기를 한 것도 아니고, 주식을 하느라 돈을 날린 적도 없다. 그런데 살림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노후는 걱정스러우며, 이러다가 빚더미 인생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산다. 대한민국 중산층 중 상당수가 겪는 이런 불안 심리는 유별난 것이 아니다. 지난 2004년 '맞벌이의 함정-중산층 가정의 위기와 그 대책'이라는 책이 나왔다. 미국의 맞벌이 중산층을 다룬 이야기다. 책에는 이런 내용을 다룬다. 학벌 차이가 평생 기회의 격차로 나타날 것을 걱정한 부모는 장기 대출을 내서라도 명문학교가 있는 곳으로 이사간다. 그리고 사교육비와 명문대 등록금을 벌기 위해 맞벌이에 나선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습이다.
아내가 공무원인 김현호(40·수성구 지산동)씨는 "신혼 초에 잠깐 저축할 시간이 있었을 뿐 집을 사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 대출이자와 학원비 때문에 마이너스 통장에 의존할 때가 많다"며 "두 아이가 중고교, 대학을 다니게 되면 부담은 훨씬 커질 것이고, 노후는 준비조차 못할 형편"이라고 했다. 홑벌이를 하는 홍대선(48·달서구 이곡동)씨는 "아내가 보험사에 다니다가 5년 전쯤 그만뒀는데, 당시 집을 사면서 빌린 은행 대출을 아직도 갚고 있다"며 "당장은 생활에 큰 지장이 없지만 7, 8년 뒤에 일을 그만두게 되면 어떻게 먹고 살아야할지 앞이 캄캄하다"고 했다.
이쯤 되면 부동산과 주식에 아무리 초연했던 사람도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자산관리업체 한 관계자는 "부동산이나 주식을 개인적인 욕심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미래를 보장해 줄 아무런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고육지책으로 부동산과 주식에 내몰리고, 결국 그 덫에 갇히고 만다"고 했다.
주식으로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꿈꾸는 중산층에게 영화감독인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가 지난 2004년 출간한 '이봐! 내 나라를 돌려줘'라는 책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1990년대 주식 투자열풍이 불면서 미국 중산층들도 화려한 노후를 꿈꾸며 엄청난 돈을 주식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거품은 사라졌고 주식시장에서 무려 4조달러 이상이 증발해버렸다. 개미 투자자들이 "설마 이렇게 무너지려고?"라며 막연한 기대 속에 재산을 거덜내는 사이 대기업 CEO들은 10억~20억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 시세 차익을 거둬들였다. 무어는 이렇게 말한다. "중산층들은 주식 투자를 하며 개인 브로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치 부자가 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접시도 핥아보지 못하게 됐다. 그럼에도 부자 환상을 깨지 못하고 있다."
◆나는 무늬만 중산층이다.
경찰 공무원인 박모(42)씨는 "과연 중산층이라는 게 있는지 의문스럽다"고 했다. 공무원 월급이 적다고 하지만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일 뿐 평균 근로자 임금으로 따지면 결코 적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박씨는 "물려받을 유산이 없는 이상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저 월급만 받아서 중산층에 진입한다는 것은 꿈 같은 성공 스토리일 뿐"이라며 "지난겨울 난생 처음 아이들과 함께 스키장에 다녀왔는데 50만원이 들었고, 외식을 한번 가도 근사하고 맛있는 집을 찾는 게 아니라 싸고 맛있는 집을 찾게 된다"고 푸념했다.
주부 권모(35)씨는 "한달 가계 수입이 400만원이 넘으니 결코 못사는 집은 아니지만 살림을 살아본 주부라면 이 돈으로 저축하고 문화생활을 즐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것"이라며 "백화점에서 정가대로 옷을 산 적은 한번도 없고, 심지어 아울렛에서 옷을 살 때도 가판대에 먼저 눈이 간다"고 했다. 주부 이모(43)씨는 "와인 열풍을 흉내라도 내 보려고 대형소매점에 갈 때마다 한두병씩 사곤 했는데, 그 돈도 한달에 20만원을 훌쩍 넘겼다"며 "유명 와인도 아니고 그저 1만~3만원짜리를 마시면서 중산층 흉내라도 내고 싶었는데 사실 아이 학원비와 기름값 생각하면 그마저도 사치인 셈"이라고 했다.
국내 와인시장은 지난 2006년 3천억원대를 돌파했고, 올해 5천억원대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관계자들은 2006년 0.59ℓ 1인당 연간 와인 소비량도 2010년 0.76ℓ로 치솟아 앞으로 5년을 전후해 8천억~1조원 규모의 시장 형성도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아울러 전국 스키장 이용객은 2005년 시즌에는 569만명, 2006년 시즌에는 600만명을 돌파했다.
아껴 쓰고 쪼개 쓰는 중산층도 많지만 '나라고 못할 이유가 없잖아'를 외치는 '나도주의(me-tooism)'와 '옆집도 하는데'를 삶의 기준으로 내건 '이웃효과' 때문에 황새를 쫓아가려는 뱁새 중산층도 많다. 2000년대 초반 명품 대중화 바람을 선도했던 당시 20대들이 지금은 '루이비통 세대'로 엄마가 되면서 유모차와 아기 젖꼭지까지 수입 명품을 쓰는 것도 단적인 사례다. 아울렛에서 50%를 세일한 가격도 80만원이 넘는 여성 정장을 보며 "어머, 이거 싸게 나왔네!"라고 탄성을 지르고, 아직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중형차를 몰면서 "요즘은 개나 소나 다 수입차 모는데 중형차가 별거냐"고 코웃음을 친다.
회사원 김현수(40)씨는 "대한민국에서 중산층으로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달픈 일"이라며 "돈이 없어도 있는 척, 와인을 몰라도 아는 척, 백화점 갈 형편이 안 돼도 되는 척하며 살아야 하고, 그런 척을 하기도 어려우면 중산층이 아니다"고 말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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