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복거일의 시사코멘트] '단체적 기억'을 아껴야 한다

총선거를 위한 정당들의 공천에서 현역 의원들이 많이 밀려났다. 한나라당의 경우, 40% 가까운 현역 의원들이 물러났다.

그런 '물갈이'의 근본적 원인은 시민들이 그것을 바란다는 사실이다. 많은 시민들이 현 국회에 실망해서 '개혁'을 바란다. 그런 희망은 새로운 인물들에 대한 선호를 낳았다 정치적 사건들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는 시민들의 성향도 점점 뚜렷해진다. 정당들로선 그런 흐름을 외면할 수 없다.

국회에 대한 실망은 이상하지 않다. 우리 사회는 노무현 정권 아래서 아주 부진했었고, 당시의 정치 구도의 한 부분이었던 현 국회도 크든 작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시민들은 느낀다. 이명박 정권이 출범했으니, 국회도 새 돛을 올리는 것이 좋다는 생각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이런 충동을 그대로 따르려는 자세는 위험하다. 의원은 뛰어난 자질과 많은 경험이 요구되는 직무다. 별다른 흠이 없는 현역 의원들을 아직 검증이 덜 된 '정치 신인'들로 대체하는 것이 '개혁'이 될 수는 없다.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多選(다선)의 경력에 대한 부정적 평가다. 여러 번 검증을 거쳤고 의정의 경험을 쌓았으므로 다선 의원은 일단 긍정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 다선 의원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다는 점 때문에, 다선의 경력이 부정적으로 평가된 듯하다. 많은 나이는 부담이지만, 다선 자체는 자산이다.

경험이 많은 다선 의원들이 드문 국회는 아무래도 효율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입법 과정에선 이념과 이해가 다른 의원들이 타협하는 것이 긴요한데, 그런 일에서 다선 의원들의 경험이 당연히 큰 도움이 된다. 젊은 초선 의원들이 장악했던 현 국회를 살피면, 이 점이 실감난다.

거의 인식되지 않지만, 다선 의원들은 또 하나 소중한 자산을 지녔다. 바로 그들의 마음속에 보존된 우리 국회의 '단체적 기억(corporate memory)'이다.

어떤 단체의 역사는 문서와 같은 공식 기록으로 보존된다. 공식 기록은 실제로는 그 단체의 역사에서 드러난 부분이다. 기록되지 않아서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훨씬 크고, 그것을 모르면, 단체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 드러나지 않은 역사는 대부분 단체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의 형태로 들어있다. 그것이 바로 단체적 기억이다.

단체적 기억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구조 조정 과정에서 중간 경영자들을 많이 내보낸 기업이 겪는 어려움에서 잘 드러난다. 중간 경영자들이 갑자기 나가면, 기업은 부분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된다.

국회의 움직임은 궁극적으로 법들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그 법들만이 역사로 남는다. 그 법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 수많은 협상과 거기서 얻어진 교훈들은 의원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의원들이 지닌 그런 단체적 기억은 국회의 정상적 움직임에 필수적이다.

젊었을 때 원로 의원들에게서 들은 '숨은 얘기들'을 기억하는 지금의 다선 의원들이 후배 의원들에게 그것들을 들려주는 과정을 통해서 국회는 자신의 역사의 한 부분을 이어간다. 덕분에 4월 혁명 뒤에 태어난 초선 의원이 해방 뒤의 혼란 속에서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운 제헌의원들의 기억을 지닐 수 있다. 아쉽게도, 근년에 그런 기억의 이어짐이 많이 끊겼다. 비록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그것은 큰 사회적 손실이다. 다음 총선거에선 이 점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복거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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