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개그보다 더 웃긴다…정치인들의 변명

2008년 한국 코미디계가 위협받고 있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정치인들의 어이없는 말실수 하나, 변명 하나에 국민들의 웃음보가 터지고 있다. 치솟는 물가와 경제 불안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 국민들에게 웃음으로 위안이라도 주려는 것일까. 서민을 웃고 울린 한국 정치인들의 낯부끄러운 말의 향연 속을 들여다보자.

"나는 적에게 꼿꼿하지만 국민이나 아군에게 부드러운 사람."

지난해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할 때 고개를 숙이지 않아 '꼿꼿 장수'라는 별명을 얻은 김장수 전 국방부 장관의 정치 행보가 도마에 올랐다. 그는 16일 한나라당에 입당원서를 내면서 이 같은 소회를 밝혀 입방아에 올랐다. 참여정부 마지막 국방부 장관으로서 지난달 29일 퇴임한 지 20일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우상호 통합민주당 대변인이 16일 내막을 밝혔다. 이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3월 1일 손학규 대표와 만나 "60만 군의 명예를 위해 비례대표 2번을 달라"고 요구했고 손 대표가 이에 응했다. 그러나 일주일 뒤 그는 "선후배와 상의해 보니 반대가 많아서 아예 정치권에 가지 않겠다"고 통합민주당에 알려왔다. 다시 일주일 뒤 그의 한나라당 영입이 발표됐다. "안보에는 여야가 없다"는 것이 그의 항변이지만 '철새 장수' '양다리 장수'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MB정부 말실수 도미노

이명박 정부 장관 후보자들은 연일 히트작을 쏟아내고 있다.

17일 열린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화두는 '귀신땅'이었다. 정청래 민주당 의원이 최 후보자 아들의 '땅 3천㎡(900평) 15차례 매매' 의혹을 제기하자 그는 "아들에게 물어보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하더라"고 답한 것이 화근이 됐다. 정 의원이 "귀신이 땅을 사서 팔았다는 얘기"라고 비꼬자 최 후보자는 "그렇다고 생각한다"며 응수했다.

박은경 전 환경부 장관 후보자는 땅 투기 논란에 대해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하는 것일 뿐 투기와는 전혀 상관없다"라고 해명해 실소를 자아냈다. 본인과 가족 명의로 전국에 40곳에 부동산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이춘호 전 여성부 장관 후보자도 서울 서초동 오피스텔 구입에 대해 "내가 검사에서 유방암이 아니라는 판정이 나오자 남편이 감사하다며 기념으로 사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두 사람의 변명은 성난 넷심에 불을 지폈다. "왜 하필이면 돈 되는 땅만 사랑할까?" "오피스텔이 무슨 관광지에서 파는 기념품이냐. 감기가 아닐 때는 차 한대 뽑아 줬겠다"는 조롱이 잇따랐다.

남주홍 전 통일부 장관 후보자는 "부부가 교수를 25년 동안 했는데 둘이 합쳐 재산 30억원인 것은 다른 사람에 비해 양반인 셈"이라는 말때문에 눈총을 받았다. 교수 부부 연봉이 5천만원이라면 30년 동안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가능한 돈이다. 논란을 일으킨 이들 세 사람은 결국 모두 후보에서 사퇴했다.

이번 내각 장관 가운데 가장 재산이 많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자신의 140억원대 재산에 대해 "내가 배우 생활을 35년 했다. 배용준을 한번 봐라"고 말해 구설 대열에 합류했다.

◆청문회까지 이어진 황당 해명

"여의도가 사람이 살기 그리 좋은 지역은 아니다." "사실은 (4천만원짜리) 싸구려 골프 회원권"(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 거주 중인 여의도 아파트 외 부동산 투기 의혹과 골프 회원권 2개 소유한 것에 대한 질문에 답변)

"중3 때 연합고사 수석을 한 딸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아 (딸을) 미국에 보내면서 국적을 포기하게 했다."(김성이 보건복지가족부 장관, 딸의 한국 국적 포기 질의에 대한 해명)

'강부자(강남 땅부자) 내각'이라고 비아냥 받은 후보자들의 변명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계속됐다.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노동부 고용정책심의위원 시절(1996~1998) 6차례 회의에 한번도 참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고용 그 자체에 대해 제가 발언한 정도의 실력이 없었다"고 말해 "고용을 모르면서 노동부 장관을 할 수 있느냐"는 자질시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치권의 말실수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전·현직 대통령의 말실수는 어록으로 만들어져 인터넷에서 회자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막가자는 거지요"부터 시작해 "군대에서 몇년씩 썩히지 말고" 등의 '막말'로 인해 재임 시절 내내 야권 및 언론의 집중포화 대상이 됐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해 9월 국회 조찬기도회에서 "대통령직보다 하나님이 중요", 8월 신문사 편집국장 만찬에서 "덜 예쁜 여자가 서비스 좋다" 등 부적절한 발언을 해 입방아에 올랐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경상도 사투리와 영어 발음, 엉뚱한 답변 등으로 각종 화제를 만들었다. 1987년 대선후보 시절 '전술핵'을 '원자로'로 착각하기도 했고, "강원도의 아름다운 지하자원(원래 아름다운 자연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개발해" 등의 '어록'을 남겨 코미디의 소재로 다양하게 인용됐다.

◆정치인와 코미디언, 누가 더 웃기나

이쯤 되면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했던 코미디언 고 이주일이 하늘에서 무릎을 칠 법도 하다. "정치가 잘 돼야 코미디도 잘 된다"라고 했던 그는 "정책을 연구할 시간에 경조사에 불려다녀야 했다"며 자신보다 더 웃기고 연기력도 뛰어난 동료 의원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국회를 떠나며 그가 남긴 "(국회의원 임기) 4년 동안 코미디 잘 배우고 간다"는 소감은 촌철살인의 극치다.

나쁜 버릇은 쉽게 배운다고 했다. 정치에 갓 입문한 신인마저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국민에게 허탈한 웃음을 안겨주는 상황이다. 정치포털 '서프라이즈'에서 한 네티즌(필명 황포돗대)은 "다른 나라 가서 살려고 해도 음식 때문에 걸렸는데, 그보다는 심심해서 못 갈 것 같다"며 후진적인 정치풍토를 비꼬았다.

엄기홍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최근 정치인들의 잇따른 말실수는 단기적으로 흥밋거리로 머물 수도 있지만, 반복되면 이명박 정부의 스테레오타입(전형)으로 고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이명원 씨는 "사려 깊지 않은 말의 탈선이 정치 불신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고, 경기도의 한 의원은 신문 칼럼을 통해 "당과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내면의 연기력이 살아나는, 가슴으로 연기하는 개성파 코미디언이 살아남는 정치쇼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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