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체험학습] 홍의장군 魂 살아 숨쉬는 '의령 정암진'

의령은 임진왜란 때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던 홍의장군 곽재우가 활동했던 지역이다. 읍내에는 곽재우와 그 휘하 장병의 위패를 모신 충익사가 있는데, 이곳에서 우리는 의병들의 불굴의 호국정신을 배울 수 있다.

망우당, 홍의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곽재우는 의령에서 출생했다. 그는 문무에 뛰어났으나 관직없이 초야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발적으로 부대를 조직, 나라에 대한 충의를 내걸고 싸웠다. 그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 지휘관으로 뛰어난 전략과 용병술로 불패 신화를 남겼다. 곽재우를 홍의장군이라고 부른 것은 홍의에 백마를 타고 활약하면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휘하에 수천의 의병을 거느리면서 낙동강 지역의 현풍에서 남강 유역의 진주에 이르기까지 방어선을 구축하여 육로로 이동하는 왜병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했다.

충익사에서 나서서 남강으로 향하면 정암진이 나온다. 남강이 의령을 지나 흐르면서 범람원인 정암들을 만들었다. 굽이치는 남강이 깎아놓은 절벽 위에 있는 정암루에 올라서면 넓은 정암들을 굽어볼 수 있다. 또 남강을 내려다보면 물 위로 솥을 닮은 바위인 솥바위(정암·鼎岩)가 솟아 있다. 정암진은 남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자,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곽재우의 혼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정암진이 왜 임진왜란의 격전장이 되었을까. 그것은 왜군이 부산에서 진주를 거쳐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이때 남강을 건너는 왜군을 늪지대로 유인하여 격멸시킨 것이다.

지금 정암루에 올라 이곳을 바라보면 예전의 늪은 사라지고 없다. 대신 제방을 쌓아 개간해 농경지로 이용하고 있다. 또 정암교가 놓이면서 이곳이 의령의 관문이 되었다. 이렇듯 남강과 정암진의 많은 변화로 임진왜란 당시의 현장감은 다소 떨어지지만, 눈을 감고 홍의장군과 의병들의 통쾌한 활약상을 상상해 보면 어떨까.

백승진(대구서부고 교사)

◆정암진에 대한 Q/A

▷곽재우가 정암진에서 왜군을 격멸한 전략은?

곽재우가 정암진에서 2만의 왜군을 물리친 것은 바로 그가 정암진의 지리적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왜군 정찰대는 정암진 일대가 늪지이기 때문에 부대의 통행이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통과할 수 있는 지점에 나무를 꽂아 도로 표시를 해 두고 돌아갔다. 곽재우는 왜군 정찰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가 밤에 표지목을 늪지로 옮겨 꽂았다. 다음날 왜군이 잘못 표시된 표지목을 따라 늪지에 빠지자 곽재우가 기습 공격을 가해 왜군을 격멸한 것이다. 이것이 곽재우의 의병활동 중 가장 빛나는 승리로 꼽히는 정암진 전투다.

▷정암진의 지리적 특성은?

정암진은 함안과 의령의 경계를 흐르는 남강에 위치한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남강이 흐르면서 깎아낸 하천 절벽인 하식애와 침식되다 남은 강물 속에 솥을 닮은 바위인 정암이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지금은 정암교가 놓여 남강을 쉽게 건널 수 있다. 정암루에 올라서면 남강이 범람하면서 퇴적물을 쌓아 만들어 놓은 범람원인 정암들을 볼 수 있다. 정암들은 현재 제방을 쌓아 개간하여 논으로 이용하고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는 질퍽한 늪지대였다. 곽재우가 정암진에서 왜군을 크게 물리친 것은 바로 이런 남강과 주변의 절벽, 그리고 넓은 범람원 지형을 이용했기에 가능했다.

◆주변에는 이런 곳도 있어요!

▷신라통중의 우흔(천연기념물 제196호)

약 1억년 전에 형성된 빗자국 화석으로 지름 8∼15㎜, 깊이 1㎜ 정도의 빗방울 자국들이 겹쳐져 있다. 이것은 약 1억년 전, 가뭄으로 호수 바닥에 쌓였던 퇴적물이 노출되었고, 그 위에 떨어진 빗방울의 충격으로 자국이 생긴 것이다. 빗방울 자국이 생긴 퇴적물의 표면이 마르고, 그 위에 새로운 퇴적물이 쌓인 후 오랜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굳어져 돌로 변한 것이다. 빗방울 자국은 건조한 기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며, 세계 여러 곳의 지층에서 발견되지만 매우 희귀하다. 당시의 환경을 알 수 있는 자연사 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크기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봉황대와 일붕사

봉황대는 벽계계곡을 오르는 길목 오른쪽에 있다. 퇴적암층에 수직틈이 만든 기암절벽이 봉황의 날개 모양과 같다고 하여 조선후기 김해부사 정현석이 봉황대라 이름 지었다. 봉황대 옆 일붕사는 천혜의 자연요건을 갖춘 대한불교일붕선교종의 총 본산으로 세계 최대 동굴법당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으며, 727년 신라 혜초 스님이 창건한 성덕암이 전신이라고 한다.

▷보천사지 삼층석탑(보물 제373호)

이 삼층석탑은 원래 보천사의 법당으로 추측되는 위치의 전면에 석등, 대좌와 함께 서 있으며 이중의 기단 위에 삼층 방형 탑신을 얹은 전형적인 신라시대 양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제작 연대는 고려초기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또 보물 제472호로 지정된 보천사지 부도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지면에 넓은 방형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팔각괴임 1단을 각축하여 하대석을 받치고 있으며, 부도의 높이는 3.35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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