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기행] 김훈의 '칼의 노래'③

전쟁이 끝난 저녁바다엔 쓸쓸함만이…

▲ 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묘와 그 주변. 이순신 장군이 평생 안고 다녔던 쓸쓸함이 느껴진다.
▲ 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묘와 그 주변. 이순신 장군이 평생 안고 다녔던 쓸쓸함이 느껴진다.

현충사를 돌아 나오면서 매우 쓸쓸했다. 엄숙하고 장엄한 느낌보다는 쓸쓸해야하는 내 생각의 흐름이 더욱 쓸쓸했다. 진정한 쓸쓸함은 아마 그런 것이리라. 엄숙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보다는 쓸쓸한 팬플루트 연주를 들은 듯한 느낌. 소설 '칼의 노래'가 주는 감흥도 사실은 비슷하다. 대단한 승리를 담은 소설이지만 소설의 내용은 승리 그 자체보다는 통제사의 목소리, 나아가 통제사의 내면을 채운 쓸쓸함으로 이루어진다. 그만큼 문자의 힘은 강하다.

통제사의 묘소로 향했다. 새로 만들어진 4차로 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길을 잃었다. 사실 살다가 잠시 길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던가. 다시 걸으면 길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던가. 그게 어디든 걸으면 이미 길이 아니던가. 단지 그만큼 시간이 흐를 뿐이지. 늘 시간은 거기에서 나를 기다릴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불현듯 사라져버리는 수많은 시간들. 그 빈 허공에는 지키지 못한 약속들만 떠돌아다닌다.

통제사의 묘소는 조용했다. 내린 눈을 밟으며 묘소를 향하는 고갯길을 올랐다. 길에 밟히는 눈의 감촉이 따뜻하다. 사그락거리며 발끝에서 부서지는 소리도 애틋하다. 멀리 보이는 묘소에는 두 사람의 방문객만 보였다. 제법 넓은 터에는 하얀 눈이 잔디를 덮고 있었다.

임진년 바다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많았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절박하게 내 목을 조여 오는 그 거대한 적의의 근본을 나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으나, 내 적이 나와 나의 함대를 향해 창검과 총포를 겨누는 한 나는 내 적의 적이었다. 그것은 자명했다. 내 적에 의하여 자리 매겨지는 나의 위치가 피할 수 없는 나의 자리였다. 싸움이 끝나는 저녁 바다 위에서, 전의(戰意)가 잠들고 살기가 빠져나간 함대는 비로소 기진했고 노을 헤치며 모항으로 돌아가는 항해 대열은 헐거웠다.

그 저녁에도 나는 적에 의해 규정되는 나의 위치를 무의미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힘든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는 어느 날,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처럼, 애도될 일이 아닐 것이었다.

(김훈, '칼의 노래' 부분)

통제사를 조였던 그 거대한 적의의 근본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적에 의해 자신의 자리가 매겨지는 전쟁이라는 상황. 싸움이 끝난 저녁 바다 위에서 통제사가 느낀 감정은 오히려 쓸쓸함이었다. 차라리 그렇게 적의 손에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그에게 자연사일 것이 자명하다. 그는 결국 자연사를 택한다. 택한다는 표현이 잔인하다면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냥 그에게 그것은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일 뿐인 것이다.

제법 큰 무덤 위에도 하얀 눈이 드문드문 덮고 있었다. 눈이 녹아 질퍽질퍽한 잔디 위에서 사배를 올렸다. 술잔을 올리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마음 같아서는 밤새도록 옆에 앉아 술잔을 나누고 싶었다. 성웅 이순신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과 만나고 싶었다. 통제사가 평생을 안고 다녔던 지독한 쓸쓸함을 만나고 싶었다. 무덤을 돌았다. 오른손을 무덤 위에 얹고 수없이 통제사를 불렀다. 덮인 눈 사이로 보이는 잡초를 뽑아내었다. 그러면서 내 마음 속에서 계속 자라나는 잡초를 뽑아내려고 노력했다. 내 하찮은 쓸쓸함을 뽑아내려고 노력했다. 신기하게도 잡초는 어디에나 존재했다. 뽑아내는 거기에도 잡초는 다시 자라고 있었다. 하찮은 쓸쓸함도 어디에나 존재했다. 뽑아내어도 쓸쓸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현충사에서 바라본 풍경보다도 훨씬 짙은 안개가 건너편 산등성이를 맴돌고 있었다. 끝내 안쪽의 적을 향해 내리치지 못한 통제사의 칼의 노래가 쓸쓸했다. 그럴 수는 없었으리라. 그것이 통제사의 본질이기도 했으니까. 묘소를 내려오는 길에 올려다본 묘소 근처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쓸쓸하실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제 나는 돌아가야 하니까. 보잘것 없는 내 삶이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소중한 사람들도 존재하니까.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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