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 소설은 '짧게', 여운은 '독자에게'

봇코짱/호시 신이치 지음/윤성규 옮김/지식여행 펴냄

현대 독자들은 짧고 경쾌한 소설을 선호한다. 근래에 장편소설이 많이 나오지 않는 것은 쓰기 힘들기도 하지만 독자가 줄어든 때문이기도 하다.

장편소설을 읽을 땐 줄거리나 사건 전개 외에 여백에 주목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부분 독자는 작가가 여백으로 비워둔 부분을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으로 채워 넣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백을 지루하게 생각하거나 아예 읽지 않으려는 경향도 보인다. 이 같은 분위기를 극복하려는 소설, 혹은 이 같은 분위기를 꿰뚫어 본 소설이 '쇼트쇼트(초단편 소설: 200자 원고지 20∼30매)' 혹은 '원 페이지 스토리(200자 원고지 10∼20매)'이다.

'원 페이지 스토리'나 '쇼트쇼트'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원고지 50∼100매쯤의 단편소설과도 다르다. 주로 짧은 한가지 사건을 통해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쇼트쇼트' 혹은 '원 페이지 스토리'의 특징이다.

'쇼트쇼트'는 그래서 인물의 성격이나 고뇌보다는 짧은 하나의 사건이 던져주는 상징에 더 많은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다.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별장지의 아침.

숲 속 길을 N씨가 산책하고 있다. 그는 큰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인데 주말이면 별장에서 휴식을 취하곤 한다. 숲 속 길은 새소리가 들릴 뿐 조용하다. 오솔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나무 그늘에서 밝은 복장에 화사한 화장, 그리고 상냥한 목소리를 가진 젊은 여자가 나타나 길을 막는다. 길을 막아선 여자는 '나는 살인청부업자입니다'라고 말한다.

설마….

설마라니? 농담을 하자고 내가 지금 여기서 당신을 기다린 줄 알아요?

그렇다면 그 녀석의 짓이겠군. 이렇게 비열하다니. 제발 부탁이니 날 죽이지 말아주시오.

오해하지 마세요. 당신을 죽이려고 온 게 아니라, 주문 받으러 온 겁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여드리죠. 선불은 필요 없어요. 뒤탈 없이 일을 깨끗이 처리한 후 돈을 받기로 하죠.

뭐라고? 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소.

좀 전에 '그 녀석의 짓이겠군', 하셨죠? 그 사람이 G산업 사장이죠? 라이벌이란 것 알고 있어요. 소리 없이 죽여드리죠. 물론 아주 자연스럽게…. 교통사고나 약물, 강도로 위장하는 어설픈 짓은 하지 않아요. 우리는 스트레스 혹은 병으로 사람을 죽이죠. 저주라고 할까요? 6개월 안에 반드시 죽여드리죠.

정말? 그렇다면….

여자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떤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다. 증거가 될 만한 선불도 없었다. G산업 사장이 소리 없이 죽어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라이벌인 그가 죽고 나면 내 회사는 반석 위에 설 것이다. 저 여자를 믿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손해 볼 것은 없으니 두고보자.

4개월 후 G산업 사장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던 중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물론 자연스러운 병사였기에 경찰 조사 따위는 없었다. 그의 죽음은 소리내지 않고 완성됐다. 얼마 후 N씨가 산책하는데 그 살인청부업자가 다시 나타났다.

약속한 돈 주셔야죠?

아무렴, 드려야죠.

N씨는 약속한 돈을 줬다. 돈을 주지 않으면 자신이 그렇게 소리 없이 죽게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라이벌이 죽고 회사사정이 나아지고 있었다.

살인청부업자는 돈을 받아들고 사라졌다. 미행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옷과 머리모양을 원래대로 바꿨다. 그녀는 큰 병원의 훌륭한 간호사였다. 의사들은 이 간호사를 무척 신뢰했다. 여자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가 입원하면 의사들에게 물었다.

저분 상태 심각하죠?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3개월 혹은 4개월…. 하지만 누설하면 안 돼. 신상변화는 비밀이니까.

간호사는 진료카드에 나온 주소로 직업을 조사하고, 환자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이나 라이벌을 찾아가 의뢰를 요구한다. 그리고 세월이 살인청부의뢰 건을 자연스럽게 해결해 준다』 -살인 청부업자입니다-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는 이런 식이다. 이 책 '봇코짱'에 실린 많은 짧은 이야기들은 예상하지 못한 결론으로 독자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는 짧지만 재미있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달하고 나머지 전부를 독자가 채울 여백으로 남겨둔다. 232쪽, 8천9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

호시 신이치는 별이나 우주에 관한 SF를 비롯해 1천편이 넘는 '쇼트쇼트'를 쓴 작가다. 그가 사망한지 10년 3개월이 지났지만 일본에서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호시의 작품을 재평가하려는 작업도 한창이다. 2007년 12월엔 도쿄에서 '사모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 책 '봇코짱'은 호시의 쇼트쇼트 스토리 문고 제1호로 1971년 5월 초판 발행 이래 지금까지 일본에서 86쇄, 214만부가 팔렸다.

그의 소설이 아이들한테 인기가 있었고, 그는 아동작가라는 '인식'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작가 아베 고보('모래의 여자'로 세계에 이름을 알린 작가)와 쓰쓰이 야스타카('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알려진 일본 SF문학의 선구자)가 여러 문학상을 수상한 데 반해 호시는 나오키상도 못 받았다.

그러나 호시의 작품 중 57편은 지금도 잘 팔리며, 지금까지 발행부수는 3천만부를 넘는다. 신쵸문고에서 출간한 호시 신이치의 작품 중에 밀리언셀러는 모두 9편, 이는 나쓰메 소세키('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유명한 작가)의 8편을 앞지른 숫자다.

호시 신이치는 '쇼트쇼트'를 일본에 정착시킨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무척 짧고 간단해 보인다. 그래서 '나도 쓸 수 있겠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는 않다. 우리나라에도 '원 페이지 스토리'를 짓는 작가들이 있지만 뚜렷하게 주목받는 작품이 없는 것도 생각보다 쓰기 어렵기 때문이다.

호시 신이치의 작품에는 구체적 지명이나 인명, 혹은 시대를 짐작하게 할 고유명사가 거의 없다. 그래서 미래소설 같기도 하고, 과거소설 같기도 하다. 물론 분위기로 추론할 때 그의 작품은 대부분 현대, 혹은 다소 미래가 배경이다.(그러나 사실 호시는 이미 10년 전에 사망한 작가임을 염두에 두자.)

비교적 오래 전에 씌어졌음에도 호시의 작품이 최근 작품처럼 여겨지는 것은 시사적이거나 풍속적이지 않고, 시대를 증명하는 단서가 될 고유명사가 없기 때문이다. 시대성, 즉 동시대 독자가 공감할 만한 키워드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독자의 눈길을 끌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강한 메시지를 지닌 것이 호시의 작품 특징이다.

조두진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