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심영섭의 올 댓 시네마] 숙명

어수선하고 소란스런 마초들의 자멸극

'숙명'은 과거'친구'나'사랑'이 그러했듯, 멋진 남자와 거친 남자의 가변 차선 속에 몸을 묻고, 끝없이 삶을 조각내 갔던 사내들의 이야기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를 믿어서도 안 되며, 여자는 남자들을 버리는 비정한 세상의 난투극. 몸으로 한 세상을 기어 넘기는 사내들, 순정과 육체를 동시에 파는 여자들, 세상에 대한 구역질로 거침없이 내뱉는 질펀한 육담이 난무하는 그곳.

사실 김해곤 감독에게는 카드 깡을 막으며 지새웠던 지난 날의 삶에서 육화된'진흙창 생'에 대한 동물적인 '감'이 있다. 각본을 썼던'파이란'이나'라이방'에는 알싸한 남성 환타지 대신 생활에 절어 버린 사내들의 땀 냄새가 물씬했다. 감독데뷔를 한'연애,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는 그 빌어먹을 신분차라는 것이 우리사회의 가장 낮은 동네에서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심지어 상류층과 중류층의 계급차보다 더 엄혹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그려냈다.

그래서 이야기는 통속적이지만, 일반 대중에게 통하는 통속성은 부족한 그 절묘한 부정교합. 그 가운데 주류를 빗겨가는 변방영화의 향기와 쫄깃한 대삿발이 자타가 공인하는'김해곤 표'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명'은 장엄한 운명의 길을 직선으로 추락하는 갱스터 장르의 쾌감 대신, 어수선하고 수선스런 마초들의 자멸극으로 2시간을 채운다. 이 영화에는 스토리는 있으되 플롯이 없고, 인물은 있으되 캐릭터가 없으며, 액션은 있으되 액션의 미학이 없다.

권상우가 맡은 철중은 가족에 대한 부채감과 책임감으로 물질적 욕망에 매달리며, 한없이 세상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동물적 캐릭터이지만, 시종일관 욕을 입에 달고 다니며 툭하면 핏대질에 삿대질에 발길질만을 할 뿐이다. 송승헌이 분한 김우민은 철중의 배신으로 상처입는 내면을 감추며 밤 거리를 배회하는 고독하고 부박한 사내이건만, 막판에 가면 그 마저 누군가의 배에 사시미 칼을 꼽는 마성을 드러낸다.(특히 화면과 겉도는 주인공의 1인칭 나레이션이란!)

한 마디로 김해곤 감독은 캐릭터와 줄거리 모두의 측면에서 관객에게 말을 걸고 소통하고 설득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대체 세상이 지옥이라면, 이들이 물질적 갈망 외에 이토록 처절하게 서로를 배신해야 하는 연유는 무엇이며, 무엇보다도 이들의 우정이 얼마나 뜨거웠길래 지금 벌어지는 배신의 화마가 그토록 쓰라린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숙명'은 뻑하면 교통 신호를 무시하고 불법유턴을 하는 범법자들과 마약을 상용하고 감정 과잉의 퇴행을 벌이는 미숙아들과 어떤식의 인간적 관계도 없이 보스의 감정적 쓰레받기가 되는 조폭 똘마니들의 집합소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도 참기 힘든 건, 행간에서 느껴지는 감독의 이데올로기적 폭력이었다. 여성 캐릭터를 자유 의지조차 없는 물건처럼 그려내고, 남성 캐릭터의 마초 근성에 대한 각주 정도로 생각하는 감독의 태도는 구태의연하고 시대착오적이다. 영화 속 조폭들이 농담 따먹기를 하며 "너 사기'도둑질'폭행'강간 다 해봤잖아"라고 하자 "그래도 강간은 안했어. 강간 미수야"하는 게 유머스런 대사로 삽입될 만큼, 감독은 지독히도 여성 관객에게는 둔감함을 드러낸다.

'숙명'은 장르의 관성을 타고, 한류 스타를 활용하는 기획력과 한국적 액션을 퍼덕거리는 날 것으로 표현해 보려는 연출 의도가 도드라 보이지만, 인연과 운명의 끈에 얽혀 파멸해 나가는 갱스터 장르의 완숙도를 보여주기에는 기량 미달, 함량 부족인 것 같다. 장엄한 주제의식을 겨냥한'숙명'이란 제목은 영화에서 포켓 끝에 걸친 멋진 행커치프가 아니라, 감정과잉으로 빠져 나온 찔찔이 손수건이 돼 버렸다. 어지러운'이명'만을 남긴다.

심영섭(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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