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역 광장에서 서편으로 약간 떨어진 후미진 공간에는 보물 제56호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이 서 있다. 이 벽돌탑이 자리한 동네의 이름은 현재 안동시 운흥동이지만, 이 탑의 이름에는 엉뚱하게도 '동부동'이란 지명이 들어가 있다.
오래 전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이 탑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일제 초기의 일인데, 이 일대가 1914년 이후 '동부동'에 속해 있었으므로 탑의 이름이 그렇게 정해졌던 것이다. 이웃하는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국보 제16호)의 경우에도 지금은 법흥동에 속하지만, 일제 초기에는 이곳이 신세동이었던 탓에 이걸 따서 탑의 명칭을 부여한 것과 마찬가지의 연유라고 하겠다. 간혹 옆동네의 이름을 잘못 따서 붙여진 탓에 그렇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 부분은 지나친 오해다.
이 전탑의 표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문양이 들어있는 벽돌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전탑이 일제에 의해 수리된 때는 1916년 3월이다. 이 당시에 상당한 부재가 새로 보충된 탓에 그리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온통 밋밋한 형태의 벽돌 일색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벽돌 위에 잔뜩 새겨진 낙서들이다. 이것이 석탑이었다면 전혀 그럴 수가 없었겠지만, 연한 재질의 벽돌이다 보니 사람 손이 닿을 만한 높이까지는 못이나 칼끝으로 온갖 잡다한 글들을 새겨 놓았다. 대충 훑어보니, 이러한 내용들이 눈에 띈다.
'五重塔 作別, 金氏' '1946.3.25 鄭益模' '金南浩 辛未 十月 末日' '1949.6.17日 金大義' '김호일 1970.4.1' '李虎成 1987.10.17' '崔都澈 記念 昭和 十三年 六月 七日' 등등.
이것 말고도 일본사람의 이름인 듯한 '小松キシン'과 어느 성당의 서양인 수도사로 보이는 'MONK CALVIN H.'라는 글씨도 보인다.
누군가는 안동역 앞 공원에 놀러왔다가 심심풀이 삼아, 다른 누군가는 기차시간을 기다리다가 덩달아 기념 삼아 새기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고적 답사차 이곳을 찾았다가 방명록처럼 자기 이름을 새겨놓은 흔적들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 시기를 살펴보니 해방 직후의 것들이 월등히 많이 눈에 띈다. 그나마 최근에 새겨진 새로운 낙서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큰 다행인 듯하다.
자고로 금강산을 비롯한 명승지의 바위마다 빼곡히 들어찬 것이 권세가들이 새겨놓은 기념휘호이거나 그들의 이름 석자이거늘 그것은 아름답다거나 풍류라 일컫고, 이들보다 신분이 낮은 여느 사람들의 낙서는 하찮다 하고 무가치한 것이라 폄하하는 일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하여 문화재 혹은 자연경관을 망치는 훼손행위라는 점에서는 오십보 백보이다.
물론 보물로 지정된 벽돌탑에 남몰래 글씨를 새기는 일이 범법행위라는 점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문화재에 새겨진 낙서조차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스란히 남겨 놓은 삶의 흔적이자 그 자체가 소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재미있는 글귀 하나가 보인다. '1958 이수창 007연애작전'이라는 내용의 낙서가 그것이다. 당시 이 사람이 20세 남짓한 청년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지금은 70줄에 가까운 노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사람의 연애작전은 과연 좋은 결실을 맺었을지, 그리하여 다복한 일생이 되었을지 그것이 자꾸 궁금해진다.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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