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울릉군 북면에 둥지 튼 '7080 스타' 이장희

그건 너~ 바로 너~♪ 울릉도는 내 천국의 꿈입니다

▲ 울릉도에서 농사꾼으로 정착한 가수 이장희.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이 없어 다소 생경하다. 그의 현재 모습을 언론사 카메라 앵글에 담은 것은 처음이다. 허영국기자 huhyk@msnet.co.kr
▲ 울릉도에서 농사꾼으로 정착한 가수 이장희.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이 없어 다소 생경하다. 그의 현재 모습을 언론사 카메라 앵글에 담은 것은 처음이다. 허영국기자 huhyk@msnet.co.kr

가수 이장희(61). 1970년대 그는 당대 최고의 문화 '아이콘'이었다.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잔의 추억' 등 70년대를 대표하는 무수한 히트곡들의 이장희의 손과 목소리를 거쳐갔다. 7080 포크 세대의 머리에는 흰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지만 그의 노래만큼은 추억의 또 다른 이름으로 강렬하게 각인돼 있다.

◆울릉도에 뿌리를 내리다

이장희가 울릉도에 둥지를 틀었다. 경북 울릉군 북면 현포리. 이장희의 새 보금자리다. 지난 23일과 24일 두차례에 걸쳐 그의 집을 찾았다. 그는 낫을 들고 지난겨울 말라버린 억새를 베고 있었다. 뿌연 흙먼지가 묻은 바지와 낡은 점퍼. 품새가 천상 농꾼이다. 트레이드마크였던 콧수염도 없다. 창 넓은 중절모만 아니라면 누가 그를 '그' 이장희라 볼까 싶었다.

한사코 언론과의 접촉을 사양했던 그다. '문전박대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은 기우였다. 지인과 함께 찾은 기자를 그는 반갑게 맞았다. 하지만 인터뷰는 하지 않겠다 했다. 사진도 찍지 않겠다 했다. 그저 친구로 찾아와 사는 얘기나 나누면 족하다 했다. "미국에서 하던 사업도 거의 손을 뗐고요. 이제 가수도 아니고 활동도 안 하는데 괜히 인터뷰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그냥 조용히 살려고 울릉도에 온 거니까요."

5년 전 그는 울릉도로 건너와 더덕농사를 짓고 있다. 미국에 아직 사업체가 남아있는 탓에 1년에 절반 정도만 머문다. 연중 봄, 여름, 가을 세계절은 울릉도에 머물고 겨울에는 좀 더 따뜻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가는 식이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 앞 연못에서 그가 말을 이었다. "작년에 집 앞에 연못을 파고 미꾸라지를 풀었는데요. 어느날 보니까 철새들이 다 잡아먹었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는 연못도 더 깊이 파고 연꽃도 심을까 해요."

그가 집 안으로 이끌었다. 말끔하게 단장한 단층 건물. 이장희의 아내가 쌉싸래한 국화차를 내왔다. 그의 아내도 대구가 고향이라 했다. 이씨의 목소리는 밝았고 꾸밈이 없었다. 가끔 너털웃음을 짓기도 했다. 또다시 농사 얘기. 그는 "농사는 정말 어렵다"고 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힘들더군요. 아직 농사꾼이 덜 되어서 그런지 파종이나 그런 것도 너무 어렵고 수확도 별로 없고…. 그래도 건강을 위해 소일거리 삼아 짓는 거니까요." 그는 임야와 산지 등 3만6천여㎡(1만1천평)를 매입, 절반가량에 더덕농사를 짓고 있다. 이씨는 "더덕은 한차례 파종하고 나면 4, 5년쯤 땅속에서 스스로 성장하기 때문에 관리가 편하다"고 했다.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이장희가 대중문화사에 남긴 족적에 비해 그의 가수 시절은 5년 남짓하다. 다니던 대학을 그만둔 뒤 음악다방 '쎄시봉'에서 윤형주 신중현 서유석 송창식 김세환 김민기 김도향 등과 교류하던 그는 1971년 1집 '겨울이야기'를 내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이듬해 낸 2집 앨범에서 '그애와 나랑은' '그 여인 그 표정'이 히트를 쳤고 1974년에는 영화 '별들의 고향'에 삽입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난 아직 몰라요' 등으로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1975년 '그건 너' '한잔의 추억' 등 히트곡 대부분이 금지곡의 멍에를 썼다. 같은 해 말에는 연예인 80여명과 함께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가수 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장희의 인생이 극적으로 바뀐 건 1980년. 미국 여행 도중 만난 캘리포니아 '데스밸리'(Death Valley). 강렬한 태양과 모래가 뒤섞이는 죽음의 땅에서, 그는 오히려 미국 정착을 결심했다. 수년 간 평범한 이민자의 삶을 살던 이장희는 1988년 로스앤젤레스에 한인방송인 '라디오코리아'를 세웠다. 교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라디오코리아'는 불과 4년여 만에 LA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미디어 그룹으로 급부상했다. 1992년 LA폭동 기간 중에는 정규방송을 중단한 채 상황실과 대피소, 자위대 본부 역할을 했고 당시 부시 전 대통령이 직접 스튜디오를 방문해 동포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2003년 12월 31일자로 '라디오 코리아'에서 물러났다. 홀가분하게 여행을 다니며 살고 싶다는 이유였다. 이후 미국, 남미, 유럽, 중국, 일본 등 세계의 산과 정글, 사막, 밀림 등 세계의 오지를 돌며 대자연의 숨결과 자유를 만끽했다. 지난 1월에는 환갑잔치를 겸해 친구들과 남극 크루즈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세계를 돌던 그가 발길을 멈춘 곳은 한국, 작은 섬 울릉도였다. "12년 전 친구와 함께 울릉도를 찾았어요. 절벽에서 뿜어나오는 안개가 바다를 향해 낙하하는 안개폭포와 태고의 신비를 느끼게 해주는 풍광, 가슴이 시원해지는 청정 공기를 느끼면서 이 곳이 '천국'이다 싶었죠." 그는 마을 주민들과 가깝게 지내는 편이다. 간혹 주민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주민들도 "조용하게 살고 싶다"는 그를 최대한 배려한다고 했다.

◆그가 꿈꾸는 천국은

다음날인 24일 사진을 찍을 요량으로 그의 집을 다시 방문했다. 그는 여전히 풀베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진 취재 요청에 그는 시끄럽게 화제에 오르기 싫다며 손사래를 쳤다. "울릉도를 홍보한다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을 수 없겠냐"며 거듭 부탁한 끝에 어렵사리 촬영 허락을 받았다. 낚시 얘기며, 산나물 얘기를 하다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는 올해는 8개월쯤 울릉도에 머물 계획이다. 지난달 초에는 충북 괴산의 농업학교에 입소해 환경친화 농업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 주소지는 울릉도로 옮겼지만 아직 미국의 방송국과 한인신문사 등 매듭짓지 않은 일들이 남아있는 탓이다. "5년쯤 후에는 미국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울릉도에 정착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 때는 더덕 농사 대신 마가목 같은 울릉도 향토 수종을 선택해서 묘목 단지를 만들어 볼까 해요." 그는 여전히 '천국의 꿈'을 꾸고 있었다.

울릉·허영국기자 huhyk@msnet.co.kr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 이장희는?=1947년 경기도 오산에서 태어났다. 6·25전쟁 당시 마산으로 내려가 정착했다가 초교 4학년 때 서울로 상경했다. 연세대 생물학과를 다니다 그만두고 1971년 DJ 이종환의 권유로 1집 '겨울이야기'를 냈다. 이듬해 2월 2집 앨범에서 '그애와 나랑은' '그 여인 그 표정'이 히트했다. 1973년 '0시의 다이얼' DJ를 맡으며 큰 인기를 얻었다.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가수 생활을 접은 뒤에는 음반제작자로 변신, 록그룹 '사랑과 평화'와 김수철, 김현식을 발굴했다. 1980년 미국에 정착, 1988년에는 LA한인방송 '라디오코리아'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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