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미팅·탤런트·콘센트…' 콩글리쉬 이제 그만

정확한 의미 모른채 남발…세계화 시대에 나라 망신

일상에 영어가 얼마나 많이 쓰이고 있는지는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늘 접하는 신문 광고에서도 영어는 넘쳐난다. 제대로 된 영어 표기인지 엉터리 한국식 영어인지는 확인할 길도 없다. '광고'라는 특수한 여건임을 감안하더라도 왜 이렇게 영어가 많이 쓰여야 하는지 의아스러울 따름이다. 외국인 소비자를 겨냥한 것이라면 아예 모든 광고 문구를 영어로 바꾸면 될 것이다. 놀랍게도 광고 중 '큰 글자'는 대부분 영어 또는 한글로 표기한 영어 표현이 차지하고, 자질구레한 설명에는 한글이 쓰인다. 이미 '영어 몰입 광고'는 시작된 듯한 느낌이다. 우리말은 '촌스럽고', 영어는 '세련된' 느낌을 준다는 일종의 자기비하, 사대주의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 넘쳐나는 영어 광고 홍수

신문 광고 몇 장을 들춰봤다. 영어를 남발하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한 화장품 광고에는 '투명하게 빛나는 매끄러운 피부를 가지고 싶다면…'이라는 작은 표제 아래 굵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다. 'think about pink.' 아랫부분에는 '타임와이즈 리플레니싱 세럼+C'라고 표기돼 있고, 옆에 다시 작은 글씨로 '상담은 **** 뷰티컨설턴트를 통해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돼 있다. 도대체 무슨 제품일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순간 제품 사진 아래 깨알만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다. '주름 개선 기능성 화장품.'

김치냉장고 광고를 보자. 쓰던 제품을 주면 신제품을 주는 내용. 행사 제목은 이렇다. '** 체인지 Festival' 아래 설명에는 '쓰시던 **를 프리미엄 **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기회!'로 돼 있다. 정작 한글 내용 중 '청첩장 지참'은 '청접장'으로 잘못 쓰고 있다. 다른 화장품 광고도 비슷한 형편이다. 제품 사진에 우리말은 한 글자도 없다. 제품 설명은 이렇다. '어린피부를 지키는 강력한 수분젤. **** NEW 아쿠아포스 엑스트라젤'. '지속적으로 수분을 가둬두는 모이스트 밸리어 처방으로'. 마치 암호문을 보는 느낌이다.

한 치약광고에는 '자연적인 충치예방 Cycle'이라고 적혀있고, 한 양주 광고에는 'Be a Cool Drinker'라는 표현 아래 '음주는 책임있게'라고 쓰고 있다. 진품 여부를 알 수 있다는 내용의 문구에는 '위조방지캡, 듀얼코드시스템, 정품인증시스템'이라고 쓰고 있다. 한 외제차 광고에는 가장 큰 글자는 모조리 영어다. 'Lead Your Style' 'STYLISH URBAN VEHICLE' 'Special Promotion'. 피부과 광고에는 '필러'라는 표현 아래 작은 글씨로 설명을 써놓았다. '포에버 몰딩 필러' 설명이 아니라 암호찾기 놀이 같다.

◆ 관공서와 기업들이 앞다퉈 사용

자녀 교육법을 다룬 책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대치동 선생님이 제안하는 초등저학년 교육 로드맵' '밑그림'이나 '길잡이'라는 표현을 쓰면 왜 안되는지 궁금하다. 하기야 정부나 공무원들이 앞장서서 이런 표현을 쓰고 있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로드맵은 기본이고 TF팀, 클러스터, 허브, 버블세븐, 평화 프로세스 등이 난무한다. 선거관리위원회는 'made 人 korea'라는 표제어를 내걸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투표를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 써야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깨끗한 선거, 공명한 선거'를 의미하는 매니페스토(manifesto)는 어떤가? 과거 행적에 대해 명백하게 밝히고 공약으로 승부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지만 오히려 외래어를 사용함으로써 혼란만 가중시킨다.

신문이나 방송 용어도 마찬가지. 모 월간지 제목에는 '맞춤관리법' 대신 '맞춤캐어법'으로 쓰고, '식이요법' 대신 '다이어트 매뉴얼'로 쓰고 있다. 풀 스토리, 테크닉, 스타일링 패션, 쿨(cool)하게, 아트센터, 타운하우스형 빌리지 등등.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만치 많은 외래어와 외국어가 경계선도 없이 난무한다. 아파트 이름에는 캐슬, 파크, 팔레스(팰리스), 타운이 봇물을 이룬다. 우스개로 떠도는 이야기 한토막. 한 유학생이 외국 대학에 장학금을 신청하면서 집 주소에 '*** castle'이라고 썼더니, 성(城·castle)에 살면서 무슨 장학금이냐며 퇴짜를 맞았다고.

세계로 뻗어가는 우리 기업들의 이름은 어떤가? 조선업으로 유명한 'stx' 그룹에 문의했더니 'System, Technology, eXcellence'의 약자라고 설명했다. 미국 볼티모어에 본사를 둔 스포츠용품 회사로 똑같은 이름의 'stx'가 있다. 한국담배인삼공사를 뜻하던 'KT&G'는 영문 머리글자를 버리지 못해 'Korea Tomorrow & Global'이라는 의미를 연결하기 힘든 조어를 만들어냈다. 일본이 고속철도 이름을 '신칸센'이라는 자국어로 지은데 비해 우리나라는 'KTX'로 이름지었다. 순수한 우리말 기업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다.

◆ 엉터리 영어 홍수

돌아보면 우리는 온통 영어 속에 살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발맞춰 아예 영어를 공용어로 바꾸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할는지 모르지만 거리의 간판이며 책상 위에 놓인 문구용품 하나만 들여다봐도 얼마나 영어가 많이 쓰이는지 알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영어 몰입 사회'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영어를 못한다고 난리다. 영어는 난무하는데 엉터리가 많기 때문이다.

"저 탤런트는 웬일로 에스에프(SF) 영화에 다 나왔네? 지난주 골든타임에는 에로 무비에 나오더니만. 저런 사람도 싸인해주면 좋아할까? 내 친구가 대학 때 저 사람이랑 같은 써클이었대. 간신히 커트라인 넘어서 들어왔다던데. 미팅도 같이 갔었고, 여름방학 때 콘도에도 놀러갔대. 술은 마셨다 하면 원샷이고, 시험칠 때 샤프 안에 쪽지를 넣어서 컨닝하다가 들킨 적도 있대. 사고도 많이 쳐서 늘 깁스하고 다닌데다, 여자랑 스킨십은 얼마나 좋아하는지. 완전히 개그맨이야. 캠퍼스커플이었는데 헤어진 뒤에 여자는 아직 올드미스야. 근데, 이 오디오는 언제 산 거야? 씨에프(CF)에서 본 제품 같기도 하고. 로타리 건너 가게에서 샀어? 서비스는 없었어?"

위의 예문에 쓰인 외래어 또는 외국어 중 잘못된 표현은 몇 개나 될까? 일본식 영어의 잔재가 남아있는 부분도 있고, 출처도 없이 영어 머리말을 줄여서 만든 엉터리 영어도 있다. 우리말을 직역하는 바람에 의미도 안 통하는 우스개식 영어로 바뀌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엉터리 영어'를 검색하면 쓰임새에 맞지 않거나 아예 표현이 틀린 우리말식 영어가 줄줄이 등장한다. 우리나라 성(城)에 대한 표기를 'castle'(캐슬:봉건 영주의 집)이나 'fortress'(요새)로 한정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지적도 있다.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직역한 탓이다. 오히려 우리의 성은 성곽도시, 즉 'wall(ed) city'의 개념으로 봐야한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다리가 가늘어서 이름 지어진 '세발낙지'를 다리가 세개라고 번역해 'Three legs octopus'라고 번역해서 거리 간판에 붙여놓은 경우도 있다. 식당 차림표에 '육회'를 'Six times' 또는 'Six membership'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예 코미디다. 세면기에 아기 기저귀를 갈 수 있는 공간까지 갖춰진 화장실을 'washroom'이나 'restroom' 대신 굳이 'toilet'을 고집하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이다. 이런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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