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3월 29일 당시 대표적인 사회운동가인 월남 이상재 선생이 78세로 타계했다. 장례는 한국 최초의 社會葬(사회장)으로 집행됐다. 그의 운구행렬에는 무려 10만명의 국민이 따랐고 YMCA를 비롯한 243개 사회단체들이 주도했다.
충청남도 서천에서 출생한 그는 과거에 낙방하고 박정양의 식객노릇을 한다. 이후 1881년 신사유람단 수행원과 초대 주미공사의 1등서기관으로 관직생활을 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조직,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을 준비했다. 결국 관직에서도 물러났다. 이후 독립협회가 친일파로 득세하자, 기독교를 통한 사회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가 기독교를 처음 접한 것은 1894년 초대 주미공사의 1등서기관 시절. '무엇이 미국을 이렇게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을까'하는 생각을 하다가 미국의 종교에 궁금증을 갖게 됐다.
그뒤,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간 이상재는 우연히 감방 벽 틈에 끼여 있던 마태복음 5장과 산상수훈을 발견, 읽고 또 읽으며 비로소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다.
이후, 소년연합척후대(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 조선일보사 사장, 신간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46년 걸스카우트 발족 ▶1974년 진시황릉 첫 발견
정보관리부 이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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