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실의 해리 왕자가 아프가니스탄 전선에서 복무하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외 언론이 한바탕 호들갑을 떨었다. 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지칭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그가 보여줬다는 이유에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장 모범적 사례로는 로마가 첫손에 꼽힌다. 명장 한니발의 카르타고와 벌인 16년 동안의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 최고 지도자인 콘술(집정관)의 전사자 수만 해도 13명에 이르렀다. 로마 건국 이후 500년 동안 원로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15분의 1로 급감한 것도 전투에서 귀족들이 많이 희생된 탓이었다. 사회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에 힘입어 로마는 세계의 맹주가 됐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로마에 뒤지지 않는 국가에 대한 충절을 보여준 이들이 너무도 많다. 왜적을 물리친 가장 큰 힘은 바로 의병(義兵)이었다. 특히 충과 효를 중하게 여기는 유교적 전통이 강한 가야산 자락에 살던 선비와 유생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전장에 뛰어들어 붉은 피를 뿌렸다. 서양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능가하는 나라 사랑을 올곧게 실현한 것이다.
두 부자의 충절 어린 충신문!
성주군 수륜면 면소재지를 지나 고령으로 가는 33번 국도. 대가천과 나란히 뻗은 이 길을 2, 3분쯤 달리다 보면 왼쪽으로 작은 다리 하나가 나타난다. 윤동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자, 붉은 기둥에 고운 단청을 입힌 작은 건물이 보인다. 충신문(忠臣門)이다. 약 400년 전에 만들어진 충신문은 긴 세월의 더께가 쌓여 고색창연하다. 몇차례 중수를 했다지만 건물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충신문의 주인공은 박이현(朴而絢)과 그의 아들인 박영서(朴永緖)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인 박이현은 한강 정구, 동강 김우옹 등과 교의한 인물로, 임진왜란 때 김면(金沔)의 의병진에 참전해 큰 공을 세우고 성주 가천에서 전사했다. 사후에 공조참의에 추증됐고, 의민공(毅愍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아들인 박영서는 무과에 급제한 후 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의 선봉장이 되어 황주 신교전투에 참가했다가 순국했다. 후에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대를 이은 아버지와 아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는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들을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함)를 내렸고, 이를 편액하기 위해 정각(旌閣)을 세웠다. 충신문 주위에는 기와를 얹은 네모난 토석 담장을 둘렀고, 정면에는 일각문을 내어 출입하도록 했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기단은 자연석으로 쌓았고, 주초는 원뿔형의 화강석 주초를 사용했다.
가야산 자락인 성주 수륜에 살던 박이현은 곳곳에 많은 전설도 남겼다. 산에 있는 큰 바위 밑을 흐르는 장군수를 마시고 힘이 세졌다거나, 마을 앞 냇가에서 아무도 잡지 못하던 굴레벗은 큰 말을 얻었다는 이야기 등이다. 또 '화살을 삼킨 말' 전설도 있다. 자신이 산을 향해 활을 쏘고, 화살이 산에 닿기 전 말은 화살을 물어오도록 시합을 했는데 말이 화살을 물어오지 못했다는 것. 화가 나서 칼로 말의 목을 쳤는데 목에서 화살이 튀어나왔다는 이야기다.
일제에 수난을 겪은 쌍충사적비!
성주읍 경산리 서문고개에 있는 쌍충사적비. 임진왜란 때 영남지방에서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우다 성주성(星州城) 싸움에서 전사한 제말(諸沫)과 진주성 싸움을 돕기 위해 출전, 전사한 조카 제홍록(諸弘錄)의 업적을 새겨 1792년에 세운 비다.
제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웅천, 김해, 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1593년 성주목사에 제수돼 성주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우고 순절했다. 그 조카인 제홍록은 숙부와 더불어 큰 전공을 세웠으며, 이순신 장군 휘하에 있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했다. 효성이 지극한 그는 홀어머니를 산속에 숨겨 두고 왜적을 쳐서 쫓다 순절했다.
쌍충사적비는 높이 216cm, 너비 79cm, 두께 37cm다. 비신을 받침돌 위에 올리고 이수(비의 머리 등에 뿔 없는 용이 서린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를 얹었다. 이수에는 서로 엉킨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맞대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조선후기의 비석양식을 잘 담고 있다. 쌍충사적비는 처음에는 지금의 성주초교 앞 길가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 관헌들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방치되었던 것을 1940년쯤 도로확장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제말과 제홍록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사적비가 세워진 것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18세기말이었다. 여기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경남 칠원의 어느 관리가 잠을 자는데 관복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나의 무덤이 어느 산속에 어떤 좌향으로 있으니 잘 알아서 하시오"라고 했다는 것. 그 무덤을 찾아보니 오랫동안 방치한 탓으로 무덤의 형상은 남아 있으나 잡초만 우거져 있는 것을 잘 수축해 제사를 올려 혼백을 위로했다. 관리의 꿈에 현몽한 사람은 바로 제말이었다.
제말 등의 전공은 전쟁통에 드러나지 않아 표창되지 않다가 200년이 지난 뒤 임진왜란에 대한 여러 기록을 다시 조사한 끝에 나라에서 제말에게 병조판서의 벼슬을 내리고,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도 내렸다. 조카인 제홍록에겐 병조참판이 제수됐다. 성주와 진주 두 고을엔 쌍충사적비를 세웠다. 제말의 7대손인 제경욱은 홍경래의 난 때 창의해 공을 세우고 순절하기도 했다.
성주 땅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제말은 키가 8자에 몸무게는 400근이나 되는 거인으로 하루에 수백리를 달리며 싸웠기 때문에 '비장군'으로 불리웠다. 또 그 눈과 수염의 위세가 당당해 왜군들 중에서 감히 덤비는 자가 없어 무적행군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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