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에서 승리한 뒤 이번 총선에서 200석도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라며 큰소리치던 한나라당의 꼴이 우습게 되어가고 있다. 공천에서 친박 측을 대거 솎아냈을 때의 기세는 어디 가고 이제 패장으로 물러앉은 박근혜 전 대표에게 도와달라고 떼를 쓰고 있으니 그렇다.
공천심사에 들어가기 앞서 한나라당은 개혁공천을 약속했다. 참신하고 유능한 인사를 많이 공천해 당의 체질과 면모를 일신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얻는 집권당이 되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친이의 독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철저한 친박 솎아내기로 비쳐졌고, 친박 측의 반발과 당의 분열이 이어지면서 민심이 등을 돌리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그 과정에서 대구경북도 시급한 과제인 경제 살리기의 추진을 위해 필요한 능력과 비전을 갖춘 인사들이 낙천되는 사태를 맞았다. 특히 3선 이상 중진이 전멸해 이제 대구경북은 수도권의 직할통치령으로 전락하게 됐다는 한탄이 나오기도 했다.
200석도 어렵지 않다던 호기가 과반의석 확보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다급함으로 바뀌면서 한나라당은 박 전 대표에게 지원유세를 해달라는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를 야박하게 말한다면 싸움에서 실컷 두들겨 팬 사람이 맞은 사람에게 "나 죽게 생겼으니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꼴이다. '친박연대'라는 희한한 이름의 정당이 오직 박근혜 마케팅만으로 선거를 치르려는 것도 웃기지만 박 전 대표의 치맛자락을 부여잡는 한나라당의 애원은 더 꼴사나운 코미디이다.
이 같은 애원은 한나라당이 덩치만 컸지 허약하기 짝이 없는 허풍선이라는 고백밖에 안 된다. 한나라당에 그 많은 '실세'와 지명도 높은 정치인들이 있지만 정작 박근혜를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은 없다는 것을 이것만큼 적나라하게 말해주는 장면은 없을 것이다. 뿌리 깊은 보수정당이 박근혜 한사람이 없어 과반의석을 위협당한다면 이 정당을 밀어준 지지자에게 너무 면구스러운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사태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총선에 나선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들이 이 대통령의 지지도가 하락하자 각종 홍보물에 'MB'(이명박의 이니셜) 또는 MB와 함께 찍은 사진을 삭제하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이것뿐만 아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태도가 너무 오만하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서울 경기지역 출마자 15명은 1일 오전 기자회견을 갖고 박 전 대표의 지원유세를 요청했다. "박근혜 전 대표님! 한나라당을 위해 지원유세에 나서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이들의 성명은 간곡한 호소를 담고 있지만 태도는 전혀 간곡해 보이지 않았다. 두들겨 팬 사람이 맞은 사람에게 부탁하려면 먼저 사과부터 하는 것이 순서다. 개인 간 폭행사건에서도 그렇게 해야 합의가 된다. 그렇지만 이들의 호소 어디에도 그런 것은 없었다. 있는 것은 당신 자식들에게 우리 자리를 뺏기게 생겼으니 자식을 버리라는 매정한 선고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요청은 기자회견이 아니라 비공개 접촉으로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것이 '정치적'으로도 어울린다. 그렇게 본다면 이들의 기자회견은 "우리가 하라는 대로 안 하면 재미없어"라는 협박밖에 안 된다. 같은 날 강재섭 대표가 관훈토론회에서 박 전 대표에게 한 부탁도 마찬가지다. 수도권 출마자들과는 달리 유감의 표시도 있었지만 메시지는 두들겨 맞은 기억을 버리고 우리를 도우라는, '당신은 배알도 없느냐'는 소리를 감수하라는 것이었다.
친이 측은 대선후보 경선 뒤에도 똑같은 요구를 박 전 대표에게 했었다.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이명박 후보 캠프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야 한다는 소리를 흘렸다. 이에 대해 전투에서 졌지만 항복하지 않은 패장에게 백기까지 들라는 요구나 마찬가지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권력은 아들과도 나눌 수 없다고 하지만 나누지 않고는 쥘 수 없는 것 또한 권력의 속성이다.(전제군주도 권신과 권력을 분점하지 않았던가) 독식을 생각하는 순간 정치판은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살벌한 검투장이 되고 만다. 한나라당이 벌이고 있는 코미디는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린 데서 비롯된 것이란 생각이다. 윈스턴 처칠은 "전쟁에서는 단 한번 죽지만 정치에서는 여러번 죽는다"고 했다. 여러번 죽으려면 여러번 살아나야 한다. 그렇다면 죽은 듯 보이는 친박도 살아날 수 있고 살아있는 친이 역시 죽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정경훈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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