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정부가 다문화주의를 공식 채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78년이다. 백호주의(백인우선정책)를 던져 버린 호주는 피부 빛에 연연치 않고 그들이 평등하게 사회에 참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이런 노력은 한 세대를 거치면서 국가와 개인의 생존가치로 호주 국민들 사이에 폭넓게 자리 잡아왔다. '블랙홀'처럼 다양함을 빨아들이며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호주. 거기에는 정부의 노력에 더해 세계를 내 것처럼 품어낼 줄 아는 국민들이 있었다.
◆다르기에 더 좋다.
지난달 8일 호주 시드니 시내의 록스(The Rocks) 마켓은 여느 때처럼 세계 각국의 문화를 만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자동차의 진입이 통제된 100여m의 도로는 오전부터 노란 천막이 뒤덮였다. 거리 가판대에는 세계 각국의 골동품, 액세서리, 옷가지 등이 즐비하게 널렸다. 먹을거리도 풍성해 관광객은 물론 호주시민들도 매주 주말이면 이곳 록스장터로 몰려든다.
터키의 전통 인형을 파는 아쉬프 씨는 "이민자의 나라 호주가 만들어낸 세계 만물 박람회"라고 록스장터를 소개했다. 정체불명의 언어들, 흥정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일본인 관광객 야미코 씨는 "호주 원주민의 부메랑을 기념품으로 샀다는데, 교과서에서나 보던 세계 각국의 전통문화를 한곳에서 체험할 수 있는 전시장 같다"고 했다.
'문화적 다양성 자체가 호주의 귀중한 자원이라는 생각에서 모든 것이 출발한다.' 이는 호주 정부나 시민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 '다름에 대한 생활 원칙'이었다.
◆네 것 아닌 우리 것
지난달 9일 오후 3시쯤 시드니대학의 시모어 센터에서는 낯익은 선율이 흘러나왔다.
"누구신데 나더러 아비라 하오? 내 딸 심청은 공양미 3백석에 팔아버렸소." 배일동 명창이 판소리 심청가의 한 대목에 뽑아내자 10여명의 호주 예술가들은 "원더풀"을 외쳤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가락이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받아들이려는 그들의 태도는 진지했다.
"그렇게 노래하면 목이 쉬지 않나요?"
악보도 없이 나오는 즉흥적인 노랫말. 따라 해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는 표정들을 지었다. 배 명창은 "처음 접하는 문화일 텐데도 전혀 낯설어하지 않는다"며 "다른 것을 배워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진지함이 느껴진다"고 했다.
이 자리를 마련한 세계적인 재즈뮤지션 사이몬 바커 씨. 그는 우연히 듣게 된 한국의 소리가 자신의 음악 인생을 바꿔 놓았다고 했다. 사이몬 씨는 "한국 전통음악에는 찾아보기 힘든 응집된 기운이 서려 있다. 그것은 호주 재즈 뮤지션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뿐만 아니라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얻게 하는 훌륭한 교과서가 된다"고 했다.
호주 국민들에게는 '네 것 내 것'이 없는 듯했다. 그들의 생각은 호주에만 머물지 않고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 영화제에서 수상경력이 있는 영화제작사 에마씨는 3년째 자비를 털어 우리의 전통소리를 영상에 담고 있다. 에마씨는 "한국의 소리는 너무나 소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그것을 후대에 전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했다. 에마 씨에겐 나라가 다르고, 인종과 문화를 구별 짓는 것은 지도상에 표기된 한 줄의 선일 뿐이었다.
호주 시드니에서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 잔존하는 백호주의, 채워지지 않는 2%
이민 15년째인 한국계 A(42)씨는 몇 년전 시드니 시내 한 복판에서 4명의 백인 호주인 무리에게서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고 했다. "Go Back To Your Country(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이유는 없었다. 단지 '머리색이 검은 너희가 싫다'는 것 뿐. A씨는 "유색인종을 무조건 싫어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며 여전히 호주 사회에 남아 있는 백호주의(白濠主義)의 잔재를 꼬집었다.
호주정부는 다민족, 다인종 차별을 엄격하게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인종차별법과 기회균등법은 피부빛과 민족이 다르다고 교육, 취업, 일상생활에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호주 정책 1순위며 국가존립의 제1원칙이다.
그러나 완벽할 수 없는 걸까. 간간이 발생하는 민족간 인종간 갈등은 호주의 고민이다. 2005년 12월 크로눌라 지역에서 일어난 백인과 레바논계 주민들 사이의 폭력사태. 레바논계 갱단이 백인 인명구조원을 폭행하면서 보복전으로 치달은 이 사건은 호주사회를 경악케하며 다문화주의 실현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민자 중에는 '종교적 관례'를 들어 호주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모습도 목격되고 있다. 시드니에서 만난 제임스 로너씨는 "업무시간 도중 신에게 절을 하거나 비가 오면 등교를 거부하는 무슬림의 전통은 호주사회의 법과 질서를 거스르고 있다"며 "호주인들도 게으르고 못사는 이민자들을 보고 수당만 타먹는 파렴치한 민족으로 혐오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백인 우월주의의 잔재는 다문화주의의 완성을 저해하는 장애물이 되고 있는데, 편견을 맞본 많은 이민자들은 "'모두가 똑같다'는 것은 단지 정책홍보 수단일 뿐"이라며 호주정부의 정책을 비꼬았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이다.
중국인 아버지와 필리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민 2세 샤오쥐인 핑(25·여)씨는 취업 전선에 뛰어들면서 그녀가 20여년 동안 굳게 믿어 왔던 '완벽한 호주 시민'이라는 자부심이 산산 조각났다. 학교 성적도 우수했고, 인터뷰도 만족할 수준이었지만 합격통지서를 받지 못했다. 대기업에 지원서를 냈던 그녀는 면접장에서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면접관들을 보고 이민자 자녀의 한계를 경험했다"고 했다.
이민자 자녀들 가운데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가 많은 것도 백인들의 인종 우월주의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중 하나다. 이민 20년째인 김모(52)씨는 "혼혈인들, 특히 동양계 2세들은 호주사회의 최상위 계층에 오르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고 있다"며 "결국 이민자 자녀들이 선택하는 곳은 혼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 뿐"이라고 했다.
호주 시민권을 가진 한국계 정모(34)씨는 "아이가 다니는 학교 모임에 갔을 때 피부색이나 출신국별로 끼리끼리 모이는 부모들의 모습에서 이민족간 심리적 벽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각 나라의 이름을 딴 '타운'이 생겨나는 것은 다양한 문화지대가 생기는 장점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민자들이 호주사회가 둘러친 차별을 벽을 넘지 못한채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맺는 생존의 연대라고 말하는 이민자들. "우리는 호주인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는 3D 업종의 산업현장을 채워주는 노동자일뿐, 완전한 호주 국민은 아니다." '세계 각국의 이민자에게 항상 문이 열려 있다'고 선전하는 호주정부에 한 이민자는 쓴 한마디를 던진다.
최두성기자
▨ [인터뷰] 스콧 파로 호주 스트라스필드 시장
"우리의 정책은 다양성 안에서의 통합입니다."
시드니 인근의 인구 3만2천명의 군소도시 스트라스필드에서는 지난 2월 처음으로 '다문화'를 주제로 한 도시 축제가 열렸다. 한인을 비롯해 아시아계, 아랍계 등 세계 다양한 시민들이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시의 특성을 살리고, 전 주민에게 '하나'라는 일체감을 불어넣기 위해 마련된 것.
스콧 파로 시장은 "한국이나 중국 등 동양에서는 양력 말고도 음력을 따로 쓰고 있더라고요. 올해가 '쥐띠'라죠?"
그는 '번영'을 상징한다는 쥐처럼 '음력'축제가 동서양의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지역사회에 관심을 갖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했다. 집단 간의 조화는 시민들의 가장 중요한 삶의 근간이며 어울림의 도구라고 했다.
"다문화주의는 이민자와 그들의 2세들이 써내려간 200년 역사 곳곳에서 큰 줄기를 이루며 '혁신'과 '창의성'으로 발전시키는 노력들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는 스트라스필드는 지방의회와 지역 사회단체, 주정부 및 연방정부 등과 연계해 새로 도착한 이민자를 돕기 위해 문화적, 언어적으로 다양한 커뮤니티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파로 시장은 "시정부가 할 일은 사회의 균형을 맞추는 것인데 사회시설을 마련하고 행사를 통해 다양성을 발휘할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라며 "그것을 채우는 것은 시민들의 참여뿐"이라고 했다. 최두성기자
▨ [인터뷰] 세계적 트럼펫 연주자 스콧 팅클러
"다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기념품을 모으는 것과는 다릅니다."
세계적인 트럼펫 연주자 스콧 팅클러 씨는 다민족,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려는 우리가 가장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은 여러개를 섞어 하나로 만드는 혼합이 아니라 각각의 특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라고 했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일곱 색깔이 자기만의 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도 마찬가지죠."
그는 다양한 인종과 그들이 만들어 낸 많은 문화는 그대로 각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억지로 섞어버리면 특색도 가치도 없어져 버린다고 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 것은 멀리한 채 남의 것만 쫓는 자세도 바르지 않습니다."
한국에도 다녀갔다는 그는 맹목적으로 서양문화에 젖어든 일부 한국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고 했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문화적 자산을 가진 한국의 젊은이들이 전통 소리는 관심도 갖지 않은 채 힙합과 록에만 빠져든 것 같았습니다. 내 것을 바로 알고 소중히 여길 때 다른 것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다문화를 준비하는 우리, 그가 전하는 충고는 새겨 볼 만했다.
최두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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