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술 이야기]알코올의 발견

십자군 원정때 서양으로 전파

과일이나 곡식 또는 뿌리에 함유된 당분은 자연에 존재하는 효모가 증식, 성장하는데 필요한 먹이가 되고 그 효모의 소화작용에서 부산물로 에틸알코올이 만들어지는데 이를 우리는 '술'이라 불렀다. 고대인과 현대인이 술 만드는 근본적인 원리는 같지만 현대에 오면서 좀 더 과학적인 요소가 부가, 맛과 향이 좋게 개량됐다.

증류 기술을 이용, 순수 알코올을 농축한 증류주를 만들기 시작한 사람은 8세기 아랍인 '제버'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약초를 달여 얻은 원액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사산왕조시대에 페르시아에는 이미 증류주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수세기를 거치는 동안 처음에는 그리스인들이, 다음에는 아랍인들이 고체를 물에 녹여 끓인 다음 수분을 증발시킨 후 냉각작용을 통해 휘발성 물질을 찾아냈다고 한다.

알코올 증류기술이 서양에 알려진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12세기 유럽의 가톨릭 세력이 예수의 탄생지인 예루살렘을 회교도로부터 탈환키 위해 십자군전쟁을 일으켰다. 1~8차의 원정에도 그들은 성지를 탈환치 못했으나 부수적으로 동서간 문물교환이라는 커다란 성과를 얻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알코올의 증류기술이다.

본래 아랍인들은 음주가 불허돼 연금술사들은 포도주로부터 알코올을 증류한 뒤 음료 대신 향료나 화장품으로 사용하고 있었는 데 8세기에 제버가 발견한 증류기술이 십자군원정에 따라온 가톨릭 수사들에게 본의든 타의든 알려지게 된 것이다.

가톨릭 수사들이 전수한 알코올 증류비법은 순식간에 유럽 각지로 퍼져 나갔고, 앞다퉈 자신만의 비법으로 포도주나 맥주 등을 증류, 신비의 묘약이자 무병장수의 신비한 물을 '생명수(Water of life)'라고 부르면서 질병을 퇴치하는 만병통치약 또는 물건이 썩지 않도록 하는 방부제로 활용됐다. 그 후 가톨릭 수사들에 의해 증류주(오늘날 우리가 즐겨 마시는 위스키'브랜디'보드카'진'럼 등)가 탄생했다.

동양에도 아랍으로부터 증류기술이 전수됐다. 서양의 위스키에 대한 기록을 보면 1171년 영국의 헨리2세가 아일랜드를 침공했을 때 이미 원주민들이 증류주인 아스보(위스키의 고어)를 마시고 있었다는 것으로 미뤄 짐작하건데 적어도 제2차 십자군전쟁(1144년) 때 아랍의 증류기술이 전해진 것으로 보여진다. 동양은 서양의 제2차 십자군전쟁 보다 70여년이 지난 1216년 징기스칸의 사신을 멍청한 호라즘왕국이 사살했다. 징기스칸은 사신을 호라즘왕에게 보내 범인인 총독을 인도해 주면 우호관계를 유지하겠다고 했으나 멍청한 호라즘왕은 이를 거절하고 몽골 사신 마저 사형에 처하고 말았다. 그래서 서기 1219~1225년에 이르는 징기스칸의 7년 서정(西征)이 시작됐다. 1221년 징기스칸의 장자 주치가 우르겐지성을 완전히 점령한 후 주민들을 모두 들로 내보내고, 기술자들을 몽골로 보내고, 사내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아무다리아 둑을 터트려 우르게지(Urgench) 시가지를 수장해 버렸다. 이 때 몽골로 보내진 호라즘왕국의 수도 '우르겐지'의 기술자들에 의해 몽골에 알코올증류법이 전수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무렵 몽골인들은 말젖으로 만든 마유주를 마시고 있었으므로 이 마유주를 증류해 술을 만든 것으로 보여지는데 몽골인들은 이 신비의 액체를 '아라키'라 불렀다. 신영휴(금복주 부사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